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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13 17:49
   
애국지사 이대위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3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979 [142]


 

애국지사 이대위


<애국지사 이대위>, 유석종 편저, 북산책, 2010

 

2022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관에서 열린 <대한독립선언 100년의 날 선포 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였다. 이날 나는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유학생 독립선언과 서울의 3월 1일 독립선언이 있기 전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 등 국내외 여러 지역의 애국지사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이대위 목사도 있었다.

 

유석종 목사는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이대위 목사의 활동과 글들을 접하게 되었고 큰 감동을 받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는 오클랜드연합감리교회 정현섭 목사에게 이 책을 받은 후 읽으면서 교회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이대위 목사가 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유석종 목사는 그의 책에서 1부 이대위 목사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2부에는 ‘대도’와 ‘신한민보’에 발표된 글들을 선정하여 옮겨 놓았다. 책의 서두 부분에는 이대위 목사 생전의 모습이나 활동과 관련된 사진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대위 목사(David Lee, 1878-1928)는 1878년 평양 근처 강서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서 근대 학문과 기독교를 배웠다. 그의 25세였던 1903년 미국에 입국하여 1908년 30세의 장년으로 고등학교(Portland Academy) 과정을 졸업하고 버클리 대학교(UC Berkeley)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여 1913년 한국인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1년부터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 전도사로 이민목회를 시작한 그는 1918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SFTS)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대위 목사는 1903년 미국에 입국한 후 1902년 미국에 들어온 안창호와 함께 한인의 이민생활 개선과 정착을 도모한 친목회 모임을 조직하였다. 1905년 친목회 명칭을 ‘공립협회’로 바꾸고 기관지 ‘공립신보’(The Korean News)를 창간하였으며, 1910년부터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공립신보’의 명칭도 ‘신한민보’로 바뀌었다.

 

이대위 목사는 1911년부터 1928년 서거할 때까지 17년 동안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사역뿐만 아니라 국어학교를 통한 뿌리교육, 엡웟청년회를 통한 민족운동, 월간지 ‘대도’의 주필로서 기독교 복음과 신학 사상 뿐만 아니라 국제소식과 근대소식을 소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책에서 특히 감동을 받은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이대위 목사가 미주 지역 한인들을 위한 임시정부 역할을 한 것이었다. 1913년 헤미트(Hemet) 농장 사건으로 인한 한인 노동자 11명의 피해보상을 일본 영사가 받아주겠다고 하자 이대위 목사는 미국국무부에 이들은 한일합방 이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니 일인과 같이 여기지 말고 한인에 관한 문제는 한인사회에 맡기라는 요청을 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

 

이대위 목사는 재미 한인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 관리의 흉계에 즉각 대처함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받는 기회로 만들었으며, 이후 한인들의 미국 입국을 용이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대위 목사가 헤미트 사건을 통해 대한인국민회가 미국에서 ‘무형의 정부’ 역할 할 수 있도록 그 위상을 높여 놓은 것이다. 그 외에 전명운, 장인환의 스티븐스 저격사건과 관련한 구명운동, 상해임서정부를 돕기 위한 모금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 언론 활동을 하면서 오랜 연구와 시험 끝에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한 것이다. 한글식자기는 ‘신한민보’의 제작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대위 목사가 발명한 한글식자기는 현재 LA의 국민회관이 소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대위 목사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에 묻혀 있던 고인의 유해가 2005년 대전 국립묘지 독립애국지사 묘역으로 봉송, 안장되었다.

 

유석종 목사는 이 책의 말미에 “이대위 목사의 구원관은 영적 구원의 차원을 넘어 민족 공동체의 구원과 해방으로 이어졌다. 나라의 자주 독립 없이 영적 구원이 완성될 수 없으며, 복음은 민족 해방에서 구체화된다고 믿었다”고 평가하면서 “애국지사 이대위 목사는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큰 도(大道)를 펴고자 하였다”고 끝맺고 있다.

 

임봉대 목사(에벤에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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