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바오 출판사, 2009)
슈테판 츠바이크는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에 대해서 ‘사상의 자유’를 가진 인물로 ‘세르베투스 살해 사건’을 목격하면서 양심의 부름을 느껴 평화로운 삶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모독 받은 인권의 이름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칼뱅을 고발함으로써 그의 고독은 비로소 영웅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p.13-14)고 평가한다.
1535년 <기독교 강요>를 세상에 내놓은 장 칼뱅은 1536년 민주주의 공화국인 제네바에 전체주의적인 요구를 실천에 옮기고, 신정주의적인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독재체제를 심었다. 칼뱅에게는 자기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기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진리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독재자에게 유아세례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미겔 세르베투스 돌을 던졌다. 교리 때문에 세르베투스는 이단으로 파문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독재자의 주장을 부인하여 그의 자존심을 긁은 젊은이는 공개 화형에 처 해지게 된다. 이것은 분명한 살인이었다.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신념은 자유다.” -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1551
이러한 사상을 가진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잔인한 살인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단자를 억압해도 되는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신구교 권위자들의 소견을 제시함>이라는 책에서 칼뱅의 사상으로 칼뱅을 공격한다. <기독교 강요> “이단자를 죽이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쇠와 불로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인문주의의 모든 원칙을 부인하는 행동이다.”(p.224) 카스텔리오가 말하는 것에는 ‘관용’ 특히 종교상의 관용을 이야기한다.
카스텔리오는 칼뱅에게 ‘우리는 더욱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잘못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기독교도에게는 사랑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의 의견을 그렇게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지혜로 인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교만한 자를 꺾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는 편지를 써 보냈다. 하지만 결국 독재자의 모순에 목숨을 잃은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항거한 카스텔리오 마저 결국 독재자의 폭력에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적수가 없을 것 같았던 칼뱅도 결국 그 힘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려 한 칼뱅주의 체계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의 이념이 되었다. 200년이 지난 다음 칼뱅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네덜란드, 크롬웰이 통치하던 영국, 그리고 미국은 가장 너그럽게 자유주의적이고 민구주의적인 국가 이념을 받아들여 카스텔리오의 요구와 함께 형제처럼 실현되었다.
종교적, 신학적 색을 빼고 이 책을 들여다보면,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볼 수 있다. 정치, 지역, 인종, 이념, 수저 등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흠잡을 것이 없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우리의 삶을 꼬집는 듯하다. 거기에 대해 백신 접종 여부로 사람을 나누기까지 하니, 다른 생각을 가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이기에 정해진 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서로를 존중받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준을 이리저리 바꾸고,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내가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삶은 아니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인주의가 당연하게 생각되는 시대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함께 생각을 나누며,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마음 따뜻한 삶을 기대해 본다.
오충환 목사 (꿈이있는미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