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기버블 (The Forgivable)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저, 윤종석 역, IVP
얼마 전 “언포기버블 (The Unforgivable)” 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루스(Ruth)는 경찰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20년간 감옥에서 복역하고 이제 막 출소한 여성이었다. 그녀에겐 유일한 가족인 어린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20년간의 감옥생활을 통해 죄값은 치룬 그녀였지만, 사회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녀의 전과기록으로 인해 평범한 직장에 취직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접근 금지 명령으로 인해 양부모의 동의 없이는 그녀의 동생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녀는 교도관이 소개시켜준 수산물 공장에 가까스로 취직했는데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와준 동료조차도 그녀가 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그것까지는 받아주지 못하였다. 그녀에게 세상은 은혜란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한 곳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살해당한 경찰관의 두 아들은 그녀의 출소소식에 이를 갈며 아버지의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필립 얀시가 그의 책에서 말한 은혜없는 세상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얀시는 고든 맥고날드의 말을 인용하는데,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 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은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중세시대까지는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적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1900년대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교회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피아노가 너무나 비싸 한때는 학교에 풍금이 자리하더라도, 교회에는 피아노가 있던 시절이 있었고, 교회가 마을의 중심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가난한 국가가 되었을 때에도 교회는 사람들을 먹였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달리 십자가만 건물에 걸어두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정은 그 시절과 크게 달라졌다. 한국의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함에 따라 이제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의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배고플 때, 아플 때, 문화적으로 갈급할 때 교회를 찾지 않고 이제 그들은 맛집을 찾아다니고, 선진적인 의료혜택을 받으며, 좋아하는 음악가의 연주를 들으러 콘서트장에 간다. 점점 교회가 감당하던 역할들이 줄어만 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세상은 제공할 수 없지만, 오직 교회가 이 세상에 베풀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얀시는 그것이 ‘은혜’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배 후 목사님과 인사를 나눌 때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하곤 한다. 미국에서는 식사기도를 ‘Grace’라고 부른다. 이 밖에도 우리의 삶에서 감사라는 표현 속에는 은혜가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은혜는 무엇일까? 얀시에 따르면 은혜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가벼운 실수, 사소한 잘못들에 관해서 용서를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잊지못할,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만큼의 상대방의 잘못을 순전히 나의 힘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에게도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타인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실 때 그들에게 용서한다는 것이 오죽 어려우면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했을까. 교회에서는 사랑, 은혜, 그리고 용서를 강조한다. 내 마음을 어렵게하는 원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매번 나의 속을 볶고 튀기고 태워버리는 진정한 원수를 만나게 된다면 그 순간에 사랑, 은혜, 용서와 같이 교회에서 듣고 배우며 고백해온 것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시는 스스로를 위해서 원수를 용서해야한다고 말한다. 용서야말로 미움, 다툼, 분노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담과 하와의 예를 드는데, 만약 그들이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와는 아담이 열매를 먹은 것에 대해 그리고 아담은 하와가 그에게 열매를 준 것에 대해 900년 동안 말다툼을 해야만 했을 것이라고. 또한 얀시는 용서는 상대방의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용서는 모든 비난의 사슬로부터의 탈출구이며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갈지 모르는 타인의 부담감을 덜어준다.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사실 루스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어린 그의 여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20년이라는 형량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동생의 죄로 인해 삶의 절반을 대신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나는 그녀의 심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팍팍한 수감생활을 그녀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그녀가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무거운 형량 앞에 뒤집어쓰기로 한 그녀의 결정에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동생을 원망했던 적은 없었을까. 그들을 그러한 상황으로 몰아간 사회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그녀는 아마 긴 형량을 채우며 살기 위해 어쩌면 미치지 않기 위해 수도 없이 동생을 용서하고, 세상을 용서해야만 했을 것이다. 용서만이 실제로 우리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그 아픈 기억들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원수가 있다면 스스로를 위해 그를 용서할 용기를 내보는 것은 어떨까? 쉽지 않다면 그 용기를 끊임없이 간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2022년이 모두에게 용서의 해이자 고통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해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민학기 (윌로우리버 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