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
<모든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 캐서린 번스 엮음, 김희정 옮김
누군가가 나에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딱 하나만 해달라 한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노 집사님께서는 6.25 전쟁 직전에 먼저 월남한 남편을 만나러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아장아장 걷던 첫아들은 시부모님께 맡기고 젖먹이 둘째 딸만 업고 내려왔는데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셨다. “제가 업혀서 내려온 그 딸입니다.”하며 장례식장에서 처음 뵌 집사님의 큰따님이 인사를 하셨을 때, 두 모녀가 평생 짊어지고 살아온 그 아픈 이야기의 무게가 내게도 전해져왔었다.
서해안 작은 섬에 사셨던 내 외조모님께서는 할아버지와 함께 통통배를 타고 인천에 와서 애관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예쁜 양산도 선물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평생 하며 사셨다. 그 소중한 기억이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원망 없이 강인하게 홀로 12남매를 기르신 힘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육체도 정신도 쇠약해져서 모든 것이 희미하게 흐려져 갈 때,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 속의 그들은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위기 속에서 용기를 내고, 위험을 감수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선택한다. 그 이야기에는 오래 지워지지 않는 감동이 있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연민과 연대의 감각을 일깨워 준다.
1997년 시작되어 스토리텔링의 새바람을 일으킨 이벤트 ‘모스(The Moth)’에서 지난 20여 년간 발표된 이야기 중 최고만을 선별해서 모아 출간한 책 <모든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가 그렇다.
햇살이 아름답던 어느 날 아침 딸아이에게서 불쑥 자신이 동성애자이며 성전환 수술을 원한다는 말을 듣게 된 어느 엄마의 이야기, 자신에 대해 별다른 자각 없이 살다가 처음으로 피부색과 이민자라는 사실 때문에 차별을 맛보았던 소년의 성장 이야기, 후쿠시마 원전 1호기 안에서 부스 점검을 하던 중 지진과 쓰나미를 맞았던 미국인 원전 기술자의 이야기, 알코올과 약물 중독자인 부모님에게서 분리되어 여러 위탁 가정을 떠돌던 아이가 친구 부모님의 편견 없는 용납을 받으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이야기 등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세월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우리 주변에도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저 인간의 도리로 내민 한 번의 손길이, 대수롭지 않게 건넨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킨 이야기,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위기를 지나고 있는 이에게 전해진 누군가의 호의가 그를 극적으로 회복시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듣게 되는 많은 이야기가, 솔직하고 생생한 그 이야기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이해와 용납, 관용의 다리가 되는 세상을 꿈꾸어본다.
강옥지 사모 (강화 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