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쇠얀 키에르케고어>, 메튜 D. 커크패트릭, 비아, 2016
나에게 있어 실존주의 철학자,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쇠얀 키에르케고어. 이 책을 읽은 후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짙어졌다. 그는 내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모든 것들에 물음표를 던졌다. 그 물음들은 내 신앙의 근원과 삶의 의도와 의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흐릿한 정신에 깨우는 죽비(竹篦)와 같았다.
키에르케고어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다.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말한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몇 날 몇 일 내 안에서 치열한 번민이 솟구쳐올랐다. 그가 내뱉었던 사상의 흔적들은 실존, 불안, 결단, 역설, 부조리 등의 단어들을 통해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하느님에 대한 본질에로 우리를 안내한다. 다른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다. 그래서 그를 니체나 샤르트르의 무신론적 신론주의와 구별하여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라고 명명한다.
이 책은 매튜 D. 커크패트릭의 시야로 본 키에르케고어의 사상을 담고 있다. 커크패트릭은 키에르케고어의 사상을 가장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윤리학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윤리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은 ‘나는 진정 누구인가?’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질문을 생각의 창고 어두운 구석에 밀어놓고는 다시 꺼내려 들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외적인 행위나 지위 등으로 규정하려 든다. - 키에르케고어는 이를 직접성(immediacy)이라 명명하였다 -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와 확보한 지위가 그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님에도... 이러면서 한 개인은 자기 자신을 상실해간다.
자기 상실이란 본연의 자아(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를 살아내지 못함을 말한다. 자기 상실의 존재는 ‘그저 멍청하게 다른 사람을 본떠 살아가는 사람’(p.26)을 일컫는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은 마치 무대 위에 펼쳐지는 쇼와 같지 않은가? 실로 자기 상실의 시대이다. 자기 상실은 내적인 혼란과 부조화의 상태이며, 이는 ‘절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절망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을 가리킨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키에르케고어의 윤리학은 하느님 앞에 개인(자아)이 바로 서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강조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기만적이라 말한다.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교인이 도리어 최악의 범죄자라 말한다. 우리가 영원성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내적인 의미를 없애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의미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억누를 수 있는 하나의 종교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만든 환영을 파괴하는 대신, 그 환영에 잘 들어맞는 새로운 형식으로 개조되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 우리와 직접 대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존경할 수 있는 손쉬운 관념이나 도덕적 모범으로 받아들인다. 무수한 그리스도교인이 죄 많은 우리의 자아에 죽음을 요구하는 고귀한 은총보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만물을 구원해 주신다는 값싼 은총을 받아들인다. 상당수 그리스도교인은 세례를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향한 새롭고도 근본적인 계기로 삼기보다 유아기에 행하는 하나의 문화형식 정도로 간주한다. 즉 대다수의 그리스도교인은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안정을 뒤흔들고 임박한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아니라 만사형통을 보장하는 안전한 보험으로 여긴다.”(p.20-21)
키에르케고어의 비판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고스란히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과연 이 부조리한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 키에르케고어는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서라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나’로 살라는 말이다.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지닌 본성의 실재를 직시하고 결단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을 통해 ‘나’라고 하는 진정한 자아가 창조된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나에게 묻게 된다.
“난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이 혁 목사(의성서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