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이 발치에 한가득 뿌려져 있는 세상
<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에이도스, 2021
“네, 모든 숲속 식물의 이름은 배웠습니다만, 그들의 노래는 아직 못 배웠습니다.”(72)
한 경제 주제의 라디오를 듣다가, ‘슬래시 제너레이션(slash generation)’이라는 신조어를 접했다. 명함 글귀 사이에 빗금을 쳐서 여러 가지 직업들을 한꺼번에 적어 놓는다고 하더라.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n개의 직업을 갖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정직하게 땀 흘려 노동하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다. 또 여러 경로를 통해서 수입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재주임에 분명하다. 유튜브나 블로그 운영 혹은 주식 등으로 합법적인 수단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 그러하다.
문제는, 오로지 돈만을 숭앙하는 태도다. 돈이 아닌 별을 헤아리는 낭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 거창한 얘기지만, 사회정의, 유대감, 공동체의 안전이나 환경보전 등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민주시민, 세계시민의 미덕이 그것일 터. 안타깝게도 덕목이라는 게 외면당하는 것 같다. 돈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이 있는데, 돈으로 살 수 없는 성스러움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런 것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형국이다.
로빈 윌 키머러의 <향모를 땋으며>는 현대인들에게 시사점이 많은 책이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서적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돈이 주인 행세하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요물에 불과할 것이다. 거들떠도 보지 않을 책임에 분명하다. 반면, 대안적인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다를 것이다.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 낼 책이라고 감히 속단해보고 싶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과거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로빈 윌 키머러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이다.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삶의 방식을 폐기하지 않은 덕에, 옛것에서 실마리를 얻어서 <향모를 땋으며>를 저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그네들의 창조설화인 ‘하늘 여인 이야기’이다. 창조 신화에는 ‘기능’이 있다. 메시지가 담기기 마련이다. ‘하늘 여인 이야기’는 황무지를 정복하며 생존했던 히브리 성경 속 이브와는 전혀 달랐다. 다른 생명체들과 호혜적인 관계로 점철된 존재, 그것이 하늘 여인이었다.
“창조 이야기는 우리에게 정체성의 원천이자 세상을 대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아무리 의식에서 멀어졌다 해도 우리는 창조 이야기를 통해 빚어질 수밖에 없다.”(21)
편입되기를 거부한 동료들도 있었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문명사회로 발을 디뎠다.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대학입학면접을 치르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성심성의껏 식물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참취와 미역취가 함께 있을 때 왜 그리도 아름답게 보이는지 알고 싶어서.” 많은 독자들이 당혹감을 느끼며, 면접관의 말에 깊이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도교수는 그건 과학이 아니라고 냉소하는 한편, 식물학이 뭔지 배울 수 있게 도와주겠다며 시혜적 태도를 취한다. 미개한 야만인을 대하듯 말이다. 그런데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은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 “저건 뭐지”라고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인가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나요” 혹은 “어떤 노래를 들려줄 수 있나요”라며 물으며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저자의 제언이 인상적이었다.
“포타와토미어로 땅은 에밍고야크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561)
<향모를 땋으며>는 세상을 선물로, 신비로 바라보게끔 안내한다. 기독교에서 증언하는 은혜와 닮았다. 내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 보상이 아닌 까닭이다. 받을 자격이 없지만,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 로빈 윌 키머러의 착상이 이것과 닮았다. 그 선물은 되갚을 수 없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살아갈 다음번 이름 모를 이들을 위해 또 다른 선물을 남기는 것뿐”(110)이라고. 그렇기에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세상을 상상해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받는 유일한 화폐는 감사뿐이었다.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상인들은 대지의 선물을 전달하는 중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 장터의 물건이 전부 헐값이었다면 나는 담을 수 있는 만큼 쓸어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부 선물이 되자 스스로 자제심을 발휘하게 되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취하고 싶지 않았다.”(53)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 데 스스럼이 없는 세상이다. 기실, 사유/소유한다는 것, 독점과 배제와 동의어이다. 돈을 지불하지 않은 이들의 접근을 차단시킨다는 것, 건물주가 되어 불로소득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잿빛 욕망에는 누군가를 위한 자리, 타자를 환대할 공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백이 없는 인생이다.
저자의 상상력이, 또한 포타와토미어의 문법이 소중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어떤 이는 존비어체계가 한국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내가 상대방보다 높은 사람인지 아니면 아랫사람인지를 확인시킨다고, 갑질이 만연한 것은 그런 까닭이라고 성찰한 바 있다. 반말은 폭력으로 기우기 쉽다고, 우리의 언어생활부터 반성할 필요가 있다. 포타와토미어의 체언과 용언은 둘 다 유정과 무정으로 나뉜다고 한다. 희미해질 때마다 상기해야 한다. 바위도, 노래도, 약도, 이야기도, 정령이 깃든 유정물이라는 것을.
김민호 목사(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