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의 숲에서 하늘을 보다
<우리말의 숲에서 하늘을 보다>, 조현용 저, 하우, 2015
이번 달은 한글날이 있는 달이다. 우리가 매일 쓰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한글에 대하여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같다. 10월 어느 날 서점에 들러 제목이 좋아 집었다. 저자 조현용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하여 현재 경희대학교 한국어 교육 전공 교수다. 저자는 재외동포와 외국인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학을 가르치는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언어가 삶과 무척이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말을 나무로 보기 시작하였으나 곧 숲을 보게 되었고, 숲을 보면서 숲 속의 나무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문득 저자가 서 있는 숲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책 저자인 김대식 교수에 의하면 ‘언어의 해상도’는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즉 인식하고 있는 것을 언어로 제대로 표현을 못하여 생기는 일이 다반사인 것 같다. 또 다른 한편은 일부러 해상도 낮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마치 청문회에서 보듯이). 아무튼 우리는 언어의 해상도를 높여 우리의 생각을 잘 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한국어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글/한국어에 관한 책을 읽어 보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제1장 나무를 보다’에서 16개, ‘제2장 숲을 보다’에서 16개, ‘제3장 우리를 보다’에서 15개 에피소드, ‘제4장 하늘을 보다’에서 14개 에피소드를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이중 각장에서 1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제1장 나무를 보다’ 중 ‘썩히다’와 ‘삭히다’이다. 우리말에는 모음이 변화되면 의미가 바뀌는 예가 많다. 이를 어사분화(語辭分化)라 한다. 모음이 변화함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일정한 공통점을 유지한다. 예를 들면, 고소하다-구수하다, 찰랑-철렁-출렁, 앉다-얹다, (사람)머리-(동물 한)마리, 늙다-낡다 이다. 주로 의미가 약한 것과 강한 것, 사람인지 동물 또는 물건인지 등의 차이를 보인다. 또 다른 예로 쓰레기-씨레기가 그것인데 이는 쓸모 여부에 따라 차이 난다. 쓸모 여부에 따라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예는 썩히다-삭히다이다. 한자어로 설명하자면 썩는 것은 부패(腐敗)가 되고 삭는 것은 발효(醱酵)가 된다. 단순히 모음이 변한다고 의미가 정 반대가 된다. 삭히는 것은 인간에 좋은 것이고 썩히는 것은 인간에 나쁜 것이 된다. 그러나 둘 모두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저자는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에서 ‘발효와 부패’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그책에서 천연균으로 좋은 빵을 만드는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자연 작물과 유기농 작물로 만든 빵에 각각 천연균을 배양하여 발효를 시켰다. 그런데 유기농 작물로 만든 빵은 부패가 되었고, 자연작물로 만든 빵은 좋게 발효가 되었다고 한다. 자연작물은 스스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성이 강해진 반면 유기농 작물은 인간의 힘으로 키워져 외부 균에 의해 썩게 된 것이다. 인간도 삭혀지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외부에 어떤 균과 만나더라도 썩히는 것이 아니라 삭혀져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독자인 나에게도 새로운 생명이 생겼다. 이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들이 부모의 손길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성장함으로써 삭혀진 인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제2장 숲을 보다’ 중 ‘죽겠다는 말’이다. 우리는 배고파 죽겠고, 추워 죽겠고, 서러워 죽겠다고 말한다. 경우 따라서는 심심해 죽겠다라고도 한다. 이렇듯 부정적 말 외에도, 보고 싶어 죽겠고, 예뻐 죽겠고, 좋아 죽겠다는 긍정적 상황에도 죽겠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밖에 성질을 죽이기도 하고, 풀을 죽이기도 하며, 배추 숨을 죽이고, 장기의 말을 죽이며, 머리칼을 죽이기도 한다. 과연 죽인다는 표현의 한계는 어딜까?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건 아닌가? 아니면 죽음이 너무 무서운 건가? 저자는 역으로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 한다. 이승과 저승에서 승은 생(生)에서 온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여기가 ‘이 생’ 곧 ‘이승’이고 내가 갈 곳이 ‘저 생’ 곧 ‘저승’이다. 우리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지극히 현세적임을 보여준다. 내세보다는 오히려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다. 조상이 좋은 곳에 가길 원한다, 그 좋은 곳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잘 되면 조상 덕이라 한다. 반면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은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조상은 부모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후손은 자식이다. 그래서 효가 중요하고 내리 사랑이 중요하다. 조상을 잘 모신다는 것은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뜻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며, 돌아가신 다음에 후회한 들 소용없다는 뜻이다. 부모님께 잘 못하면서 조상님께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살아 계실 때 제 섬김 다하여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우리는 죽음보다는 조상, 조상보다는 부모에 관심이 많았다. 독자인 나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 가셨다. 살아 계실 때 관심을 못 가진 게 후회스럽다.
‘제3장 우리를 보다’ ‘한국인의 이름’이다. 우리들의 이름을 조사하니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였다. 한국인 이름에는’정, 진, 주, 지, 재, 제, 중’ 등이 많이 들어가고 ‘숙, 선, 성, 상, 섭, 수, 순, 신’ 등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ㅅ’이나 ‘ㅈ’ 음을 좋아하는 것일까? 치음(齒音)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저자는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실 때 ‘ㅅ’에 획을 더해 ‘ㅈ’을 만들었음을 그 이유를 밝혀내고 싶어 한다. 또 이름들을 살펴보면 받침의 선호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받침 중에는 ‘ㄴ’의 선호가 두드러진다.
2005년 인기 좋았던 남자 아이의 이름을 보면, 민준, 현우, 동현, 준혁, 민재, 도현, 지훈, 준영, 현준, 승민’인데 모두 받침에 ‘ㄴ’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아 이름은 ‘서연, 민서, 서현, 수빈, 유진, 민지, 서원, 지원, 수민, 예원’ 순인데 서영을 제외하곤 모두 ‘ㄴ’ 받침을 포함하고 있다. 이 경우 ‘ㅅ, ㅈ’을 보면, 여아 이름의 예원 제외하면 모두 ‘ㅅ, ㅈ’이 포함되어 있고, 남아의 경우도 ‘현우, 동현, 도현’을 제외하면 모두 ‘ㅅ, ㅈ’을 포함하고 있다. 저자는 소설이나 교재에 들어가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만들 때 등장인물의 출생연도에 태어난 아이들의 선호 이름을 찾아 보라도 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ㅅ, ㅈ’을 초성에 쓰고 종성에 ‘ㄴ’을 쓰면 자연스럽게 선호하는 이름을 만들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왜 ‘ㅅ’, ㅈ, ㄴ’을 선호하는 밝혀 내지 못했다고 하면 독자들에게 연구해 보면 좋겠다고 한다. 독자인 나의 가족의 이름을 살펴보니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ㅅ, ㅈ, ㄴ’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왜 그럴까? 예부터 한자 이름을 사용해서일까? 나도 궁금해진다.
‘제4장 하늘을 보다’ ‘고맙습니다’이다. 우리말에 시간을 나타내는 어휘에는 대부분 천체(天體)와 관련 있다, 해와 달이 대표적이다. ‘날’이란 말도 ‘해’라는 뜻이다. 해가 뜨는 것을 ‘날이 밝았다’고도 한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 분명한 현상은 없다. ‘낮’이라는 말이나 옛 말 중 저녁을 나타내던 ‘나조(夕)’라는 말도 모두 해와 관련된 말이다. 태양은 하루를 의미하기고 하며 한 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새 해’라는 말은 새로운 일 년을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 해는 매일 뜨는 것이지만, 일 년의 시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하려고 하려는 것이다. 나이도 만들고 생일도 만들어 기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덕담(德談)을 나누게 된다. 덕(德)이 담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축복의 말, 감사의 말, 희망의 말이 담겨야 한다. ‘고맙습니다’는 우리의 행복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드는 마음의 표현이다. 저자는 ‘먼저 여러분 모두 지난 한 해 행복하셔서 고맙습니다. 지난 한 해 슬퍼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중략-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기쁘시기 바랍니다. -중략- 당신 곁에 제가 자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저도 행복하겠습니다. 더 모든 일을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더 건강하겠습니다. -중략- 저로 인해 기쁘셨으면 합니다.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스럽습니다.’ 많은 덕담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독자에게 보내고 있다. 독자인 나도 저자께 ‘한글을 알게 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
한글이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언어라고 이야기하지만 한글이 최고야 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언어는 말과 글이 있는데, 언어는 지역의 특성,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어느 언어가 더 최고인가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한자 교육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세종대왕께서는 중국말로 서로 생각을 통할 수 없어 한글을 만드셨다. 그렇지만 한자 없이 서로의 생각을 잘 통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글로써 부족한 부분이나 한글에 없는 요소로서 한자를 보완적으로 사용해야 경우들이 있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한글은 창제가 이유와 원리가 분명한 언어다. 이런 한글을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해상도가 높은 언어를 구사하여 원활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해본다.
김종일 (독성학 박사, 비앤에이치웍스(화장품 개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