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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20]
 
 
 
     
 
 
 
작성일 : 21-09-19 00:40
   
횡단
 글쓴이 : dangdang
조회 : 5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188 [114]



횡단


<횡단: 이수명 시론집>, 이수명 저, 민음사 2019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거나 바라보면서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바랄 때가 참 많다. 그 감정의 요구가 커지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실천하기도 하고, 그 요구가 그 순간으로 그치면 그저 아쉬워하거나 한바탕 불만 섞인 수다를 펴 놓고는 말기도 한다. 더구나 코로나19 상황에서는 그런 일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 10대 청소년들이 60이 넘은 할머니에게 담배를 사 오라며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게 되었다. 그 영상이 인터넷에 등장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엄하게 벌해달라는 글이 등장했고,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들에 의해 좌우될 시기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우리도 우리의 부모 세대에게는 항상 조바심이고,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봄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조바심 내고 걱정하는 역할이 단지 우리 자신이 되었을 뿐이리라.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자라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의 틈을 줄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매우 다름도 인식하고 있다. 그 기사를 대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신앙인이기에 그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온전한 이성의 성숙을 이뤄가면 좋겠으나 요즘의 10대 아이들이 교회 문턱을 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떤 제어 장치가 있어야 했나? 하는 생각에 미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초등학교 때의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항상 국어 수업을 시작하시기 전에 꼭 시 한 편씩 외우게 시키셨다. 그리고 시를 짓게 하는 일들을 수시로 하셨다. 시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문제들을 읽어내셨고, 상담도 해 주셨었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반에는 시를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우리 반에는 문제 아이들이 없었다. 혹여 있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국어 선생님의 작문 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그래서 감히 현대의 폭주하는 십대들에게 시를 짓기를 권하고 싶어졌다. 

 

결국 시를 짓는다는 것은 자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아 그것을 글로 옮겨 적는 과정이기에 한층 성숙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확신한다. 또는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시도 많고, 특히 시대 속에서 고민과 힘듦이 녹아내려 흘러가듯 지어져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시어들이라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저자인 이수명은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있다. 

 

첫째, 시는 사물의 자기표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표현하려는 그 대상을 존중하고 그에게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이 최초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물이 시보다 먼저여야 하고, 시가 시인보다 먼저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물이 시를 주도하고, 시가 시인을 주도하여야 한다.”(29)

 

둘째, 시는 사물이 요구하고 요청하는 존재의 언어를 표현하는 길이다.

“인식은 인식 대상에 대한 형상화라는 옷이 있어야 한다. 형상화는 인식에 이르는 길이다. 말이라는 것도 이미 그 자체가 기초적인 단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어떠한 추상적인 본질도 말이라는 매개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따라서 말에 의하지 않고는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인식이란 말에 의해 그려지는 구상화라 할 수 있다.”(41-42)

 

셋째, 시는 사물을 다양한 언어로 꾸미는 삶의 과정이다. 

언어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인간의 내면에서 자아와 만나도록 만든다. 그렇게 시는 언어를 통해 접촉하는 사물을 표현하고 그 표현된 사물을 바탕으로 인간은 성찰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보통의 생각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초월적 지평을 만난다.

 

“한편으로 말이라는 것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일지라도 그 말과 관련된 어떤 관념과의 관계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과 함께 떠오르는 이 관념,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이 지닌 인식의 측면을 시는 문제, 운율, 형식을 통해 최대한 이용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인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시적 인식이란 통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2)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시 짓기를 통해 다양한 사물들과 만나고, 깊은 자아를 만나고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흥적 인격이 아니라 숙고하고 내면화되어 나오는 자아는 결국 단단해져서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 슬픔이 앞에 놓이게 되더라도 낙망하거나 생을 마감하는 일까지도 막아내는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의 다음의 글이 마음에 와 닿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순수성이다. 순수한 것은 일방통행적이다. 지혜나 비 지혜는 모두 순수해서 천상적인 냄새가 난다. 시는 순수한 것이 아니다. 시는 불순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그래서 지상적이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시는 지혜나 비 지혜라기보다는, 인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라고.”(305)

 

각박한 세대에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일은 지혜를 가진 자도, 지혜를 가지지 않은 자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누그러뜨림’의 과정은 곧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가시들을 골라내어 놓고,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누그러뜨림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언어의 파괴성을 경험하고 난폭함도 경험하고 있으며, 하물며 기이한 단어들을 합성해 말하는 청소년들을 만난다. 기성세대는 그 모습에 난감해하기 일쑤이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되살려내고 우리 내면을 갈고 닦아내다 보면 멋진 언어의 능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로 전가되는 마음의 흐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한다. 

 

최태관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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