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에 대하여
<용서에 대하여>, 강남순 저, 동녘, 2017
2015년 1월 새벽,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들고 귀가하던 한 남자가 차에 치여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남자를 친 운전자는 그대로 도주했다가 결국 자수했고 이 사건은 ‘크림빵 뺑소니’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깊은 고민 끝에 아들을 죽인 뺑소니차 운전자를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운전자를 만난 아버지는 용서를 번복하며 분노한다. 뺑소니차의 운전자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어떤 진정성 있는 태도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솔직히 용서는 우리 인간 본성을 거스리는 단어다. 용서보다 “네가 뿌린대로 거두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이 더 공평해 보인다. ‘당한 건 난데 왜 내가 먼저 나서야 돼?’ 이것이 정직한 우리 마음이다. 더군다나 잘못한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인정조차 하고 있지 않을 때, 고통 받은 사람의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그 단어는 설 곳을 잃어버린다.
독일 나치 만행을 고스란히 겪은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말했다. “용서라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한다. ‘좋아, 당신이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기만 하다면 다 용서하고 싸움을 끝내지’ 그렇게 우리는 용서를 상호 교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곧 양쪽 모두 ‘저 쪽에서 먼저 시작해야 돼’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상대방에게서 무슨 신호라도 보내지 않는지 눈을 굴린다.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 용서를 빌기만 한다면!”
지금 우리 이야기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란 용서를 구한 사람만이 즉 자격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럼 결국 용서는 틸리케 지적처럼 서로 교환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잘못을 인정도 뉘우치지도 않는 이에게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성경은 왜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공평해 보이지도 않은 그것을 자꾸 하라는 것일까? 75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 앞에서, 그런 일 없다고 이미 다 해결했다고 발뺌하는 무뢰한들을 용서하는 것이 신의 뜻인가? 용서가 무엇인가?
정치와 철학, 종교와 심리학 다양한 인문학 영역을 넘나들며 연구를 해온 강남순 교수의 ‘용서에 대하여’는 이런 뫼비우스 띠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한 책이다. 그녀가 이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도 앞서 언급한 ‘크림빵 뺑소니’ 사건 때문이다. 인간 존재와 삶의 부조리함 말이다. ‘용서’라는 주제가 지금까지 여러 영역에서 많이 다루어져 왔지만 자크 데리다부터 시작하여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와 한나 아렌트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폭넓고 또한 깊이 있게 탐색한 책은 드물다. 기꺼이 우리의 시간을 내주며 성찰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고 주제일 것이다. 책장을 덮을 때 저마다 작은 해답의 실마리 하나씩 쥐고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책장을 덮은 내 손에 쥐어진 실마리는 무엇인가? 인도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법칙을 따른다면 세상은 결국 다 눈멀고 말 것이라고. 불가능해 보이고 공평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해갈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단어가 용서인 것은 그 단어가 아니고서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앙갚음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런지.
백광흠 목사(한무리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