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죽는다.
<예수의 죽음>, 이아무개, 샨티, 2003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시키려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위와 같이 고백하지만 실상 이 고백은 온전하지 않다. 예수의 죽음 또한 그의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죽게 되었는가? 그의 삶이 어떠하였길래 많은 이들의 조롱과 핍박 속에서 잔인한 십자가의 형벌로써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는 태초부터 말씀이었다. 그의 삶 속에서 말은 곧 힘이요 능력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죽은 자는 살게 되고, 병든 자는 치유되었으며, 물질에 매여 살던 이가 인간을 구원하는 이로 변화되어 갔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 말은 곧 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말을 멈추었다. 말은 그의 상념 속에서 되내어 질 뿐 결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예수가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말을 사용했다면 끔찍한 형벌의 잔이 옮겨졌을 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 받을 때 자신을 조롱하던 이들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왔더라면 그는 진짜 유대인의 왕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었다. 말이 필요할 때는 말로, 행동이 필요할 때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그는 침묵 속에서 마지막 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침묵이 무기력해보이고 우스워 보일지 모른다. 그의 잠잠한 약함이 더욱 비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구원이 있었고 그의 약함 뒤엔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 그것은 강함의 배신과 약함의 배신이었다, 구원은 약함 속에 있다. 절대로 강한 자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다의 마지막은 자신의 강함으로 인한 이끌림이었다. 그의 강함이 오히려 측은 하기는 하지만 강함 속에는 결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자신의 약함 때문에 배신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때 예수는 “약한 사람이 나갑니다. 보살피소서.” 라고 기도해 준다. 그의 약함이 비록 자신을 배신으로 이끌었지만, 그 약함 뒤에서 기도하는 예수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약함을 보듬어주는 사랑. 그 사랑은 예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여 지며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의 무지를 하나님께 아뢰며 용서를 구하는 사랑으로 귀결된다.
약함은 숫자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신을 못 박는 많은 수의 사람들. 단지 숫자로써 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진리보다는 왜곡된 숫자의 고백들이 정의가 되는 이 세상은 마치 약함이 패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정치와 경제, 교회 그리고 교회의 교리조차 전부다 ‘숫자놀음’ 아닌가! 숫자 속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다수결과 여론은 숫자가 생산해낸 최대의 악마가 아닐 수 없다. 다수결에 의해 어떤 사람은 대통령으로, 진정한 예수의 삶을 살아간다는 목사로, 또 어떤 사람은 정치범으로, 사형수로, 정신병자로, 이단자로 규정되어 간다.
“숫자에 의해 변해가는 세상의 논리는 예수를 죽이는 논리이다.”
기독교의 교리라는 것이 숫자에 의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에 의한 교리였으면 좋겠다. 그 교리대로 움직이고 살아갈 때에 많은 이들에게 겉치레의 부담과 거북스러움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회개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고, 사회를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며, 진정한 예수의 삶이 살아지는 그런 교리였으면 좋겠다.
예수의 죽음은 숫자의 논리를 뒤집는 계기이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생애가 모든 사람의 생애가 되었으며, 한 사람의 약함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었다. 지금 아무리 큰 숫자들이 내 앞을 가로 막을 지라도, 그리고 내가 아무리 연약하고 약한 숫자의 무리 가운데 서 있을 지라도 우리의 모습 속에 약함의 진리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 약함은 강함을 이겨내며 더러운 큰 수를 정화 시킬 것이다. 물론 진리를 갖추기 위한 노력과 실천의 모습이 뒤따라야 할 것이고 그 삶의 자세는 약함의 자세이자 상황에 맞게 삶의 모습들을 다양하게 변화시켜 마지막에 침묵에 이른 예수의 삶으로 살아가는 자세일 것이다.
낯선 라오스 땅에 발 딛고 있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이현주(필명 이아무개) 목사의 묵상은 답답하고 조바심 나는 선교지의 일상의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예수의 삶과 죽음을 따라 묵묵히 오늘을 걷는 것. 그렇게 연약한 나를 비우고 담담하고도 단단한 걸음을 걷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 16:24)
이관택 목사 (라오스평화선교사, 신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