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지런한 사랑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문학동네, 2020)
1991년 초,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때다. 얼결에 불려간 교장실에서, 걸프전 종전을 위해 세계 여러 나라 어린이들의 글을 모아 책을 펴내니 글을 쓰라는 말씀을 들었다. 가엽게도 나라를 대표하여 인류의 평화를 어깨에 짊어진 초딩은 여러 날 잠을 설쳤다. 잘 쓰라고 말씀하셨던가? 기억나진 않지만 잘 쓰고 싶은 절박함만큼은, 녹록지 않았던 십여 년 인생 중에 메달권이었다. 좀처럼 보지 않던 뉴스도 열심히 챙겨보며 애를 썼지만 어떤 문장도 좋은 글을 쓰고 싶던 마음에는 차지 않아 속절없이 속을 앓았다.
어렵게 글을 마쳤다. 교장선생님께 건네 드리는 원고지가 부르르 떨렸다. 지하철역 부스에서 찍은 명함판 사진 말고, 밝은, 다른 사진을 가져오라 하시기에 사진첩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그 즈음에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뻐야 하는데 슬프고 분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때의 나는 좋은 글을 쓰기에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쁜 사람은 간혹 나쁜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을 읽는 일은 언제부터인지 피곤한 노릇이 되었다. 글의 내용보다 글의 목적이나 질을 먼저 파악하려고 할 때가 많다. 글을 읽어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워서, 글의 동기나 내용이 미심쩍어서, 글을 읽기도 전에 이미 글을 대하는 마음은 무겁고 지쳐있기가 일쑤다. 나와 같은 증상을 겪는 분에게 어떤 의심도 평가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하고 싶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이다.
이슬아 작가는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간 이슬아>를 발행하고 헤엄 출판사를 홀로 운영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십 대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이십 대 초반에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한 저자는 어린 학생들의 글을 보석처럼 간직해 두었다가 이 책 곳곳에 박아두었다. 어린이들의 문장은 맑은 날 바람처럼 시원하고 새롭다. 그리고 저자는 가까이 보아도 예쁘고 조금 떨어져서 보아도 모양이 준수한 나무 같은 글을 쓴다. 읽는 일에서 사람을 만나는 느낌을 받는 게 오래간만이다. 책을 읽다가 어떤 순간에는 저자의 심정을 가감 없이 알 것 같고 그래서 저자를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는 ‘나 자신을 부지런히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유심히 다시 보는 부지런한 습관이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07)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24)
배시시 웃으며 책장을 넘긴 적이 많다. 어린이들의 글이 출발한 그 상황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저자와 어린이들이 고맙다. 마지막으로 여수 글방의 박주현 어린이가 쓴 글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반장, 부반장이 되고 싶진 않은데
선생님이 할 사람 손 들라고 하면 그냥 뭔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서 반장이나 부반장이 돼서 망하고 나면,
자괴감이 들면서 내가 낯설어진다.
김국진 목사 (산돌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