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의 파고를 견뎌낸 섬들처럼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창비, 2020
사진 한 장의 단서
휴양지로서 하와이는 아름답지만 그곳의 슬픈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 결코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 곳이다. 누구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탈출을 꿈꾸지만, 그 이상이 실현되는 순간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 곳(utopia)이며 꿈꿔왔던 낙원이 아님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1918년 일제강점기, 중매쟁이가 내민 한 장의 사진만 가지고 포와(布哇, hawaii의 한자식 음역어)에 시집을 가는 모험을 감행한 ‘사진 신부들’의 이야기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이주 결혼을 한 세 여성을 중심으로 그린 이 소설은 국권을 강탈당하고, 미래도 안정도 없이 살아가는 조선의 애달픈 초기 하와이 이민사와 얽혀있다. 한인 미주 이민 100년사를 다룬 책을 보던 중 발견한 한 장 사진에서 작가는 소설의 단서를 얻었다.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세 여성이 양산과 꽃, 부채를 든 채 앉고 서있는 모습이었다. 사진 한 장에 담긴 그들의 표정과 옷매무새에서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피어오르며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 안창호 같은 굵직한 정치인,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만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국사책 이면에 생략되거나 감춰진 미시사(微視史)의 눈물과 감동을 풍부한 여성적 공감능력과 반전의 상상력, 빠른 전개로 풀어나가고 있다. 실망할 틈도 없이 밀어닥치는 절망 속에서 자빠질 듯 고꾸라질 듯 검질긴 삶과 희망을 이어나가는 버들과 홍주, 송화의 역정은 나에게도 넉 놓고 한참 생각하게 만들었다. 소설일지언정 이들은 초기 한인 이민 역사의 자화상이며 시대를 잉태했던 한국 여성들이었다.
하루를 마치고 노곤 할 시간에 붙잡은 책을 자정 지나기 까지 놓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 전개가 놀라웠다. 내내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서술하다가 결말부에 가서 작중 화자를 깜짝 등장시키며 전환하는 방식도 신선했지만, ‘사진’이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로 이야기의 중-후반부를 단단히 연결시키는 대목에서 연신 감탄하면서 읽었다.
떨치고 싶은 운명
버들이 어머니 옆에서 지겹도록 도왔던 삯바느질과 자수는 생각지도 않게 하와이에서 세탁소와 옷 수선 일같은 사업의 밑천이 된다. 쓸모를 알 수 없었던 재주가 생존의 무기가 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의병 아버지와 순사들의 말발굽에 채어 세상 떠난 오빠의 잊고 싶은 기억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의 행적에서 기시감(dejavu)처럼 어른거릴 때, 버들은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이 병약해 시집 간지 두 달 만에 과부가 된 홍주의 불행한 첫 결혼은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져 결국 혼자 남는다. 송화의 무당 외할머니는 불행하게 삶을 마친 딸에 이어 손녀마저 무당이 되게 할 수 없어 쫓아내듯 바다 건너 사진 신부로 송화를 시집 보내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핏속에 흐르는 무병과 신들린 춤은 어찌할 수 없는지라 송화 역시 운명의 덫에 채인 듯 살아간다.
독립 운동한다고 남편이 떠난 여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 남편이 죽은 여자가 되어 먼 타국 땅에서 울면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모습이 나오미와 룻, 오르바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주 여성들의 불행에 관한 표면적 소재 이면에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슬쩍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민사회 속 감리교회의 명암
하와이 감리교회 역사는 곧 한국 이민의 역사다.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시절 사탕수수 농장의 살인적 노동량과 이주민의 설움, 차별과 무시 속에서 교회는 이민자 공동체의 구심점이었음을 소설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해준다. 태평양 한 복판에 떨어져있는 이민자들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도록 교회는 서로를 붙들어 매주는 끈이었고, 매주일 고된 노동 속에서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을 주는 해방구였다. 한인 2세들에게는 출산, 공동 육아, 교육의 모체였고, 고국의 소식을 듣고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디아스포라의 회당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곳이 서로 다른 노선의 지도자들로 인한 분열과 다툼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단장을 각각 지지하는 이들로, 동지회와 독립단으로, 윗동네-아랫동네, 업처치-다운처치로 갈라져 싸웠다. 하나로 만든 것도 교회였지만 서로를 상종 못 할 인간들로 미워하며 배척하게 만든 곳도 교회였다.
약소국의 설움과 망국 백성들의 수난
이야기의 줄거리를 벗어나는 역사적 배경에 최대한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지만,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9세기 말, 이올라니 궁전에 유폐되어 망국의 슬픔을 보았던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1893년)의 운명과 명성황후의 최후, 을미사변(1895년)과 묘하게 시대가 겹친다. 하와이 원주민의 역사와 구한말의 역사는 제국주의 시대 약소국의 설움과 망국 백성의 수난이라는 닮은 꼴 궤적이다. 힘이 없어 당할 뿐인 민족의 한을 품고,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낯선 곳에서 살아가면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삶의 전부와 일부를 떼어 바치던 사람들의 숭고한 사연과 그 자손들이 감내한 세월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결혼과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가족사를 다루면서 독자로 하여금 역사의 비극을 이다지도 실감하게 만든 작가의 힘이 놀라울 뿐이다.
젠더 갈등에 주는 메시지
소설이 주는 강요 없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 요즘 한국 사회를 종종 험악하게 만드는 성대결 양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뭐 하나 잡히기만 하면 싸우려 드는 세태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떠나 인간에 대한 존중 자체가 사라졌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희생은 물론 가족의 삶 까지도 희생하게 만드는 버들의 남편 태완의 모습에서 결코 혼자서는 서 있을 수 없는 남성의 존재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비련이 엿보인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거사를 모의-실행한 주체는 절대 다수가 남성이었지만 독립운동을 가능하도록 뒷받침 했던 여성이 없다면 처음부터 설명이 안 된다. 시작이 불가능하다.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서 노선과 계파로 갈려 싸우고 이를 부추기는 남성들의 권력의지와 대조되는 것은 아이들과 여자들이다. 위 아래 경계 없이 노는 아이들과 계모임 ‘무지개회’로 뭉친 여자들의 연합은 더 이상 ‘남의 일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공감과 긍휼로 맺어진 끈끈한 연대다. 여기에는 그 이름이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게 등장하는 존재감 없고 성실한 남자들이 이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작가를 만나고 싶게 만든 소설
작중 들려오는 황해도, 평안도 사투리는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어른들의 말씀과 어조를 익히 들어왔던 나는 어떻게 충북 청원 출신 작가가 이다지도 구성지게 사투리를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떤 계기나 비결을 묻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만의 생각이지만 이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재탄생한다면 배우들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겠다 싶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역사적인 궁금증과 보다 깊은 관심도 불러일으킨다. 비록 지나가는 관심과 얄팍한 이해에 그치더라도 좋다. 세계사적으로는 1․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국제 정세가 큰 그림이다. 한국사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 3․1운동 전후 역사, 구한말부터 시작된 해외 이주 이민의 역사 이해도 탐구하게 만든다.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기에 중요한 인물, 여러 각도에서 재해석 될 여지가 있는 이승만 박용만의 이름을 몇 차례나 되뇌며 한 이틀 동안 검색창을 맴돌았다.
작가가 애정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그때 말 못할 고생하던 사람들이다. 희생했고, 심지어 희생을 강요당했던 시대 여성들의 저력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독립 운동 남자들이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 배후에는 척박한 노동현장에서 일하고 밥 짓고 옷 짓고 빨래하고, 육아, 교육까지 끌어안고 다만 몇 전, 몇 불이라도 후원했던 여인네들의 삶이 뜨겁게 그려져있다.
신현희 목사 (안산나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