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어져 있다!
(<생태영성>, 르웰린 보간리, 한국기독교연구소, 2014년)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 성스러운 의미와 목적, 그리고 살아있음의 가장 깊은 환희를 상실했다. 우리는 점점 표피적 쾌락과 중독을 추구하고 있다.”(르웰린 보간리, 314)
플라스틱은 꿈의 물질이라고 각광을 받았다. 어떤 모양으로든 제작할 수 있고, 생산단가도 저렴하다. 위생적이기도 하고, 내구성도 좋다. 영유아들의 장난감이나 의료기기들을 떠올려보면 플라스틱의 장점을 이해하는데 수월할 것이다.
누군가가 소개해준 영상을 하나 보았다. 인터뷰 영상이었다. 인터뷰이가 말하기를 자신은 옛날 영화, 오래된 만화를 좋아한다고,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 화면에는 플라스틱이 없다고, 거기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잔상이 깊게 남는 말이었다.
플라스틱 제로 챌린지가 더디지만, 조금씩 그 외연이 확장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시민들이 정부와 기업에 불필요한 플라스틱 생산을 멈추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고, 그에 따른 변화가 체감된다. 고무적이긴 하나, 만족할 틈이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행성은 플라스틱을 비롯해 이미 인간이 만들어낸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까닭이다.
<생태영성>은 해외에서 내노라하는 활동가와 영성가들의 글이 엮였다. 문체나 글의 리듬감이 각각의 특색이 있고, 또 종교나 성장배경이 저마다 다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결은 똑같다. 우리의 생명은 이어져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신앙의 목표 중 하나는 ‘하나님의 합일’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는 체험일 것이다. 함께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면서 황홀경에 빠지는 것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것은 소중한 신앙경험이다. 칠흑 같이 캄캄한 이 세상을 살아낼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 측면의 신앙만 강조해온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생태영성’이라는 용어가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기후위기, 아니 기후붕괴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시급한 영성이 바로 생태영성이다.
아일랜드의 시인 브렌던 케널러는 “지옥이란 경이를 잃어버린 상태”라고 폭로한 바 있다.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타락하게 된다. 공경하는 마음이 부재한 까닭에 타자를 도구화하여 함부로 대하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이다.
조애나 메이시는 “생태학적 자기(ecological self)”와 “자기의 녹색화”(the greening of the self)“(188)를 주장했다. 협소한 자기정체성에서 벗어나, 우리의 몸과 지구라는 행성을 동일시하자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지구를 하나님의 몸에 빗대기도 했다. 대지를 어머니의 몸이요 강물을 조상들의 피라고 여긴다면, 우리의 행성이 하나님의 몸이라고 믿는다면, 자연을 훼손하고 착취하는 일이 어찌 발생하겠는가. 그런 성스러운 마음,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곧 생태영성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나’와 ‘너’의 경계선을 지우는 일이 필요하다. 두 팔로 서로를 포옹하는 사건이 긴요하다. 한반도의 선조들은 ‘시천주 인내천’이라 했고, 이슬람 영성가, 수피들은 우리가 어디를 향하든 거기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다고 노래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인간뿐만 아니다. 삼라만상 모두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Arne Naes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에 우리가 더욱 넓어지고 깊어져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를 보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런 책임 있는 행동과 관심은 훨씬 자연스럽고 쉽게 나타날 것이다.”(200에서 중인) 이런 세계관을 지닐 때에 우리 인간은 자연과 “상호적이며 서로 공경하는 영적인 관계”(사티쉬 쿠마르, 170)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