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시는 하나님, 걷는 사람
<나의 길을 그가 아시나니 God will make a way> 헨리 클라우드 & 존 타운센드, 좋은씨앗, 2005
‘삶을 회복시키는 몇 가지 원리’ 같은 식의 설교 시리즈 또는 신앙 서적은 제목과 목차만 봐도 기독교식 자기개발서 같아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삶을 단순화 시키고 그에 따른 분명하고 확실한 공식을 적용하게 만드는 저자들의 의도가 싫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 ‘좋은 말씀들의 잔치’가 나를 허탈하게 만들뿐이어서 더욱 그랬다. 차라리 모호성과 불안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고 비틀거리며 걷는 도상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젊은 날을 살아가고 있다. 딱히 규정되거나 파악되지 않은 불투명함이 있을지언정 완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아직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믿기에 정답을 곧잘 제시하는 이런 책이 내게는 아직도 불편하다. 게다가 이 땅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미국인의 상담 사례는 나와 왠지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20대의 패기, 30대의 큰 뜻과 이상은 지나간 것인지 누군가 이 책을 내게 추천했을 때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고 읽었다. 생각이 크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더 이상 목에 핏대를 세우지 않는 요즘 내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신 길이 있음을 믿는 저자의 체험과 상담 경험이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저명한 기독교 상담가의 숙고 끝에 채택된 하나의 사례로 본다면 거기에는 눈여겨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삶의 여러 문제를 안고 목사를 찾아오는 교인들에게 즉각 대답할 것을 찾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도 유익이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몇몇 교인들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질병을 안고 있는 사람이 방도를 가리지 않는 것처럼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닌 나의 목회 현실도 이런 유화적 태도변화의 원인이다.
삶의 고비로 인한 허무와 절망에서 길을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들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제되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존적인 사람들이나 위로해주는 위로 대용품이 아니다.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에 공기나 음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기와 음식이 우리 생명을 지속시키는데 필수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을 필요로 하도록 설계되었다. 믿음 그 자체가 길을 연다는 것은 자칫 자기 확신 또는 최면에 그칠 수 있지만, ‘하나님만이 길을 여실 수 있다’는 것은 따름(순종)이 수반된 절대 믿음이다.
이런 대전제 위에서 좋은 길동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와 성경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지혜의 높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언제든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상처와 단점을 발견, 우선 처리할 수 있다. 큰 병을 앓게 된 사람들이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를 수없이 되뇌이며 분노하다가 체념의 단계를 지나 어느 순간 상황을 수용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맡김이 주는 유익은 수용을 넘어 문제를 축복과 선물로 인식하는 것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문제를 마주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위’와 ‘안’을 본다는 말은 신앙의 속성 곧 초월과 성찰에 대한 쉽고 간명한 표현이다. 신자에게 고난은 세상에 만연하고 있었지만 몰랐던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며, 불순종과 무관심과 교만의 죄로 촉발된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고난의 길(via dolorosa)은 다른 선택지가 없는 외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혹한 외길이 사람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하지만 도리어 초연하고 단순한 믿음의 태도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로 나아가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길을 내시는 원리를 제시한 저자는 만남, 결혼, 대인관계, 친밀함과 성, 대화, 자녀 교육, 두려움과 불안증세, 이혼, 중독, 정신질환과 감정, 다이어트, 진로탐색과 같은 삶의 문제를 다루며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이 같은 문제들이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자신이 처하거나, 상담을 요청해 올 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이기도하다. 섣불리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문제 해결 방법처럼 제시하지만 않는다면 이 책의 원리 적용편은 어디까지나 성경적 가치관에 입각한 비범한 통찰이고 회복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증거들이다.
어디서 충돌을 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성급하게 정답을 제시하듯 성경구절을 전송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책을 읽는 내내 진지한 상담자인 두 저자를 보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먼저는 아픔을 호소하는 이에게 즉각 호응하되 긴 시간을 두고 듣는 것이다. 그 문제들의 발단부터 해결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상담자의 인내가 어렵지만 이것은 또한 자신이 해결책을 내놓아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메시야 콤플렉스(messiah complex)를 탈피한 상담자의 기본이다. 둘째로,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 앞에서 새 길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좀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의 기도’라 부른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야고보서 5:15).
신현희 목사 (안산나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