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파친코>,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문학사상, 2018.
교회 젊은 집사님들의 대화 속에서 얼핏 무슨 소설이 재미있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책 내용이나 제목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빌려달라며 책 읽는 순서에 나를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집사님에게서 두툼한 두 권의 책을 받아들었다.
일단 책 표지가 흥미로웠다. 제목이 ‘파친코’라니.... 교회 오락 시간에 등장하는 네 박자 게임이나 인간관계 훈련을 위한 인간 보물 지키기 같은 놀이에는 ‘게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자신 있지만 다른 게임은 그것을 운영하는 머리가 도통 없다. 그래서 관심도 없는데 이 기회에 파친코에 대해서 알게 되려나 싶었다-하지만 파친코 하는 방법은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기대하면 실망한다.
표지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지은이 이름이었다. 이름이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이름 석 자인데 게다가 옮긴이가 따로 있었다. 얼른 표지를 넘겨 저자 소개를 살폈다. 이민진은 일곱 살에 미국 이민을 한 한국계 1.5세라는 소개가 보였다. 소설은 영문으로 쓰였고 한국어로 번역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고 보니 지은이에 대한 이 한 줄의 설명은 책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서 현대(1910~1989)를 아우르면서 어느 재일동포 가족사의 애환을 그려낸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기에 이민자가 느끼는 감정을 세미하게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가족도 미국에서 조금 보태어 15년여를 사는 동안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과 익숙해짐, 삶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가져오는 제한과 기회를 겪고 있다. 그렇다 보니 책 속의 주인공 순자 혹은 선자-번역 오류인지 편집 오류인지 주인공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의 가족에게서 나의 경험과 겹쳤다가 얼른 비껴가는 장면을 곳곳에서 만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시대극을 보는 것처럼 상황이나 정서의 동화가 쉽게 이루어진다. 선자 가족은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대부분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라기보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태생적(?) 감정이 앞서는 나라라서 관심이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 나라에도 여전히 나의 동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다가왔다.
<파친코>는 몇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는 고통, 어려움, 불평, 불만이 절제되어 있다. 순자 가족이 겪는 병이나 고문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절절한 슬픔, 역사나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 인물들 간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 따위를 파고들기보다는 견디고 지나가는 쪽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저자 이민진은 고통과 어려움은 행간에 남겨두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긍정적인 부분을 더 도드라지도록 한다.
두 번째는 옳고 그름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흔든다. 순자 주변 인물들의 살아가는 배경이 파친코 사업이다. 도박 게임이라고만 여겼는데 일본에서 한인 이민자가 삶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사업이고 거기게 기댄 여러 사람의 삶을 그려낸다. 야쿠자 또한 순자 가족과 얽혀있어 부정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담고 있다. 장애인, 유부남, 목사 등등과의 사랑이다. 가족이나 남녀 혹은 동성, 다문화... 사이의 애정이 이어진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 일방적인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은 누구인지 찾아보는 것도 책 읽는 재미가 될 듯하다.
이은주 (몽고메리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