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바람을 보았니?
<마음나무>, 티토 자라쉬 무코파드야이 저,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5.
<템플 그랜딘>이라는 영화가 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인데, 장애를 극복하고 교수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웬만한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의 학문적 성과들을 달성하며 결국 성공에 이른다는 감동적인 내용의 영화이다. 물론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영화가 소위 장애를 극복한 ‘슈퍼 장애인’에 대한 승리주의와 자본주의형 판타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고, 장애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그렇고 그런 영화라 일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4월 20일 ‘장애인을 날’을 맞이하여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이전에 장애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영화는 장애인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대상화하는데 그치지만 영화<템플 그랜딘>은 자폐성 장애인이 느끼는 감각과 시각을 당사자의 관점으로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마음 나무>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학적 성취이다. 소위 자폐성 장애는 타인과 소통하는 일을 가장 어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폐성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자폐성 장애인인 주인공 ‘티토’의 심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과연 어떠할까? 티토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집중해 왔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어려워하는 ‘소통’이라는 벽을 넘기 위해 한 걸음씩 조심스런 발자국을 내딛어 왔다. 티토의 내면에서 빚어지는 고민과 성찰의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세상을 경험케 할 뿐만 아니라, ‘장애’라는 범주를 넘어 각 자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현실세계가 내 소망이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거부하니 마음이 아프다. - 티토”
티토의 내면에서 가장 많이 포착되는 장면은 바로 자신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티토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으면 날개들이 원모양으로 하나가 되고 멈추면 다시 몇 개의 날개 형태로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는 느낌이라고 고백한다. 실제로 수영을 할 때, 말을 할 때, 체육활동을 할 때, 글씨를 쓸 때, 사소하게 사물을 인지할 때, 티토는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한다.
또 여러 가지 욕구들, 예컨대 소중한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남들과 다른 사람 취급받고 싶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고, 관심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등의 자연스러운 욕구들이 자신에겐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며 괴로워한다. 티토에게 있어서 몸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으며 마음도 제멋대로이다. 자기 내면의 여러 자아(신체기관)들도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으랴?
티토는 하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소통’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자폐성장애인 또한 소통 불가의 상황 속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티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범주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소통’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라지만 아직도 우리는 소통에 있어서 너무나 부족하다.
“어떻게 놀지요! (말을 못 하니?) 어떻게 말하지요! (말을 못 듣니?) 어떻게 듣지요!
(한 번 해볼래?) 네 해볼래요.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줘요. - 티토”
티토가 만나는 세상에도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난관은 언제나 ‘어떻게’ 하느냐이다. 디테일한 방법과 태도, 그 지난한 노력이 티토의 삶에선 언제나 필수적이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섬세함이 요구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더라도, 그 차이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와 소통의 발전 가능성을 올바로 진단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차별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 날을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로 부른다. 동정과 시혜로써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세파의 곁눈질을 거부하고 진정한 디테일, 즉 ‘어떻게’라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수많은 장애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해 상상하고, 요구하고 호소하고 있다.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동정이 아닌 수용과 사랑이 있는 곳!
내 이야기가 여러분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면
내 ‘희망’은 값진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 티토”
결국 티토가 이 책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건만 단순한 불편함과 어려움을 넘어 결국 수용되지 못하고 거부되어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필자가 오랫동안 참여했던 ‘장애아동 주말학교’에서 만난 학부모님이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아이들이 주말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사 선생님들 한명이 우리 아이들을 만나면서 많이 느끼고, 변하면 그 만큼 아이들이 살기에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 주말학교는 더욱 소중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힘겨워하는 것은 실상 신체적 장애 뿐 아니라, 장애라는 굴레가 가져오는 ‘그 밖의 것’들이 너무나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편견과 증오와 배제가 일상적인 세상에서 ‘장애해방’이라는 구호는 거대한 변화보다는 작은 관심과 수용의 태도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티토의 시가 있다. 8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쓴 시라 하기엔 그 통찰의 크기가 사뭇 커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가 바람을 보았니?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
하지만 나무가 머리를 숙일 때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거지!”
이관택 목사 (라오스평화선교사, 신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