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게시판
바이블25
크리스천라이프
커뮤니티
갤러리
성경/찬송가
지역정보
로중
전도
뉴스
QT
전도모음
Cristian YouTube
     
커뮤니티
칼럼
명언묵상이미지
하늘양식
오늘의책
십자가
명상
영상
설교
말씀
독자편지
독자편지 [49]
 
 
 
     
 
 
 
작성일 : 23-11-23 05:05
   
“고통의 자리에 늘 계신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신비”
 글쓴이 : dangdang
조회 : 3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42 [61]

 

“고통의 자리에 늘 계신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신비”

 

(<일상과 신비>, 조민아, 삼인, 2022)

 

“그리스도 교회의 탄생은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부로 변화하는 초월의 사건이다.”(142)

 

  신학은 오늘날 유효할까. 유용이라도 할까.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가 있다. 무신론을 지성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꺼내곤 한다. 종교를 냉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낡은 교리들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혐오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억척스러운 태도나 배타적인 교리도 그렇지만, 교회가 초월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 주요한 문제 아닐까. 신학 없는 교회의 실상은 그러하다. 웰빙센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국 조지타운대학의 교수 조민아는 카톨릭 계열의 신학자이지만, 그의 글은 개신교 정서에도 크게 이질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의 저서 <일상과 신비>는 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 이 가르침은 카톨릭이든 개신교이든 크게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통교리orthodoxy가 무엇인가 집요하게 추궁하기보다는 정통행동orthopraxy에 더 주안을 두어야 하는 시대인 까닭이다.

 

“가난의 영성은 연대하고 소통하는 영성이다. … 남을 밀어제치고 나만 살아남도록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의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마음의 변화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만큼이나 큰 기적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127-128)

 

  교회는 하나님 나라 희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교회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그리스도인이 ‘총을 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더라. 조지아 주 미 공화당 주지사 후보였던 캔디스 테일러의 선거구호도 기억해봄직하다. 예수, 총, 아기(Jesus, Guns, Babies), 백인 기독교도들의 유토피아,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문구라고 한다.(44) 예수의 이름으로 무기 휴대의 권리를 주창하고, 낙태와 성소수자를 반대하고, 이성애 핵가족 유일주의를 예찬한다? 어딘가 아찔하다.

 

  서명에서 알 수 있듯, 일상이 곧 신비다. 신학이란 이 진실 위에서 춤추는 일이다. 저자는 대학강단에서 교양필수과목으로 ‘신학개론’을 가르친다. 그에게 신학은 “인간의 한계를 수긍하는 것이고, 지평 너머의 초월로부터 다가오는 신비를 우리 삶의 자리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학문”이며,(15) 이 때 골자가 되는 것은 “지평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을 구획하고 재단하고 억압하는 힘들을 발견하고 분석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26)이다. 

 

  하늘의 신비는 무궁하다.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담을 수 없다. 그 신비를 납작하고 초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걸 독점한 양 신도들을 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독 교회 및 기독교 유사종교에서 성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지난 세기의 영성가 헨리 나우웬의 말이 절묘하게 다가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다스리는 것이 더 쉽다. 삶을 사랑하는 것보다 삶을 소유하는 것이 더 쉽다.”(99에서 재인용) 

 

  신학함의 또 다른 골자는 ‘콤파시오’(Wendy Farley)이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이 내게 상처로 새겨질 때 우러나오는 힘”(113)이다. 자기초월, 자기비움, 하나님과의 순전한 침묵을 듣는 영성, 이렇게 변주해도 좋겠다. 신학이 현학적이거나 선험적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피부에 와닿는 체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일상 속에 깃든 신비, 하늘의 복음을 이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신학함이다.

 

“가혹하고 처절한 절망 속에서 문득 다시 일어날 뜨거운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힘이다.… 외롭게 지하철 투쟁을 이어가는 장애인들의 몸부림에서 인간의 존엄을 본다면, 일 년에 하루 광장에 나선 성소수자들의 사랑에 대한 염원이 내게 간절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내 삶도 위태롭지만 청년실업자, 해고노동자들의 불안한 삶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망가져가고 있는 지구, 죽어가는 작은 생명의 신음을 들을 수 있다면,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신호다. 생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며 그런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134)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

 

 


 
   
 

 
Copyright(c) 2012 http://bible25.bible25.com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