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상가?
(<그노스티코스>, 에바그리우스 폰타쿠스, 분도출판사, 2016)
관상가라는 말이 생소한가? 얼굴(面像)을 보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가? 에바그리우스는 “수행자는 수행의 이유들을 이해할 것이지만, 관상가는 영지적 대상들을 볼 것이다. 수행자는 오로지 영혼의 욕정부에서 아파테이아(無情念)를 얻은 사람이다. 관상가는 불순한 자에게는 소금의 역할을, 순수한 자에게는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36)라며 『그노스티코스』를 연다. 아직도 관상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가? 차라리 관상기도(수행)라고 하면 어떨까? 관상기도의 정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 기도로 내가 무엇을 얻고 있는지를 자꾸 평가하려 들면 기도를 망친다. 관상기도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데이비드 베너, 『기도 숨』, 162)
관상가(觀想家), 관상가들을 수도주의자들이라고 하면 좋겠다. 수도주의자들의 본질은 홀로 살아가며 존재의 근원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은 신비주의자들의 기본태도이기도 하다.(게하릍트 베이, 54) 에바그리우스는 수행을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프락티코스, 78)이라고 정의한다. 수행은 영혼을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여, 아파테이아를 얻게 한다. 그리고 무정념(아파테이아)은 영지적 삶, 곧 관상(gnostike)생활로 들어가 영적 인식(gnosis)을 맛보게 한다. 이처럼, 수행자(praktikos)는 수행을 통해 관상가(gnostkos)가 된다. 에바그리우스가 바라보는 관상가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민스에게서 유래한다. 당시 그노스티코스는 덕행 실천과 공부를 통해 영적 인식에 도달한 그리스도인을 뜻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용어를 받아들였고, 이후 수도사들의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19)
무정념(無情念), 관상생활은 아파테이아 혹은 어느 정도의 아파테이아 획득을 전제로 한다. 아파테이아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개념은 매우 미묘하다. 그는 아파테이아에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먼저 영혼의 욕망부에서 오는 욕정, 혹은 육체의 욕정을 극복했을 때 이르게 되는 작은 아파테이아 혹은 불완전한 아파테이아가 있다. 이것 후에 정념부에서 오는 욕정 혹은 영혼의 욕정을 포함한 모든 욕정을 극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완전한 아파테이아가 있다. 관상생활은 우리가 완전한 아파테이아에 이르렀을 때 시작되며,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향해 나아간다. 실제로 관상생활은 천사적인 삶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조건에서는 충만히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 즉 영혼의 정화는 관상생활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계속된다. 관상가는 수행의 덕을 계속 실천하면서 부단히 덕을 쌓아 나아가야 한다.(21)
애덕(愛德), 관상가는 가르치면서 이익이나 편의나 헛된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이 가르치면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관상가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지만, 모든 덕을 균형 있게 실천하려면 너무 관대해서도 안 되다. 관상가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어떤 욕정에 영감을 받은 탐구라든지 선을 향하지 않는 모든 탐구는 ‘관상가의 죄’인 그릇된 인식으로 이끌 수 있다.(23장) 관상가는 오로지 제자의 구원을 위하여 가르칠 뿐이다.(26) 관상가는 나 없는 나로 산다. 그는 애덕(Agape)로 남는다. 이기적(정념)인 나(에고)를 비우고, 이타적(무정념)인 나로 진보한다. 관상가는 가면(페르조나)를 벗어 버리고, 진면목(眞面目-참자기)에 산다. 관상가는 타인의 얼굴(面像)을 보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얼굴(面目)을 바라보는 자이다.
한천교회 전승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