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식, 긍휼의 한 숨
(<천사의 탄식>, 마종기 시집, 문학과지성사, 2020)
기도해주어! 종기야, 부탁해!/물론 나에게만 청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같이 얕은 신자의 기도발은 약하고/네가 잘 듣도록 큰 소리 내는 기도가
두서없을 것을 네가 이해해준다면……/그래? 친구야, 암, 물론 하구말고.
하느님, 내게까지 기도를 부탁하는 이 친구,/살려주세요, 늦었지만 드디어 당신을 찾는
이 친구의 지향을 다독여 위로해주세요./내 기도가 어느 틈에 몸에 스며들었는지
문득 네가 천천히 만족한 듯 웃더구나./그런데 나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고 말았네.
중략
그래, 모두 가는 길 우리는 다시 만나겠지./기도는 살아 숨 쉬는 대화,
문득 쉬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향한다./기도해, 기도해주어!
누구지? 내 안의 그 목소리는.
휴가철에도 쉬지 못한 새벽기도에 지쳐 있던 참이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이 시를 읽자마자 울컥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쩐지 눈물이나 손의 진땀이 페이지에 묻은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으로 계산하고 돌아오는 길, 척척한 이 시집에 맺힌 많은 눈물과 한숨들이, 이별에 아프고 서럽고 두렵고 그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기도’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해, 기도해주어!’ 목사인 나에게, 또 크리스천들에게 이 말은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안부인사만큼이나 흔한 말인데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고 절박한 부르짖음이다.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기도인 것이다. 기도 속의 기도다. 이 시인은 기도를 안다.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시구에서 ‘기도발이 약’하다고 한 이 겸손한 시인의 시들이, 기도가 필요한 많은 지인들도 떠올랐다.
우리는 어차피 어디로 가는지/ 한순간의 방향도 모르고 산다./내가 당신을 만나리라는/기대의 여정도, 단지/다짐하며 믿고 있을 뿐이다. (바다들의 이별,13p)
시인은 많은 이별을 말하고 있었다. 생사의 현장에서 의사로서 그가 지켜본 많은 이별이 육십 평생 스며들었던 것일까, 온통 이별투성이인 세상의 이치에 대해 그가 자분자분 적어 내려가는 시는 확실한 연륜의 깊이를 보여준다. ‘엊그제 죽은 내 친구의/호흡이 요약된 그 산책길’(친구를 위한 둔주곡,34p), ‘그러면 저 나무의 숨소리가/동생의 살아 있는 넋일까,/눈치보며 나무둥치를 안고/오래 아파온 가슴을 쓰다듬는다.’(사소한 은총, 39p), ‘이제는 이별의 손을 놓아야 할 순간/수면의 남은 말들은/젖은 소금이 되고’(침몰하는 바다, 74p), '그럼 잘 가요,../가는 여정이 아무리 힘들어도./부디 아무 상처 받지 않기를,‘(이별하는 새, 106p)와 같은 이별의 정한은 세상에 가득한 매일의 이별에 초연할 수 없는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었다. 시인의 토로는 산책이나 나무, 소금과 해변, 바다, 새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우리를 공감의 자리로 이끈다. 시인이 우리에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공감하고 그의 심경이 되도록 한다. 이것이 노래가사가 줄 수 없는 깊이 있는 심연의 자리이자. 실존의 자리였다. 60주년을 맞은 시인의 시적 실존은 더욱 가슴 아프고 연민에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그가 내쉬는 한숨을 받아먹음으로써 깊은 숨을 쉬게 만들었다.
언뜻 빗소리가 기도 소리같이 들렸다.
아, 누군가 이 세상을 이겼다는 소식, 얼마나 먼 나라에서 나를 부르는 것인가. 머리부터 떨게 하는 성령에 젖은 몸, 오래된 성당에 들어가 찬비를 털었다. (비 오는 칠레, 29p)
사연이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곡절을 물으면 모두들 한나절일 텐데/눈감고 떠나는 마르고 작은 꽃씨같이/빨리 늙어 확실한 길을 걷고 싶어서/젊었던 나이가 힘들었던 나여 (늦가을 감기, 75p)
시집의 제목이자 ‘기댈 곳이 정말 없네’로 시작하는 시 <천사의 탄식>은 우리 시대의 한탄을 보여준다. ‘당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시구에서 보이는 절망의 현실에서 시인은 한계 상황 속에 하나님과 마주하는 길로 나아간다. ‘어느새 시대에 찢긴 바람도 멎고 내 영혼이 당신께 귀 기울입니다.’ 의 고백이나 ‘인간은 누군가 만든 신비이고 그 길 끝에서 우리를 집으로 인도해주는 손길, 반성의 기미만 내 유서가 되어 고개를 깊이 숙이네,’의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쳐 시가 도착하는 지점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다.
... 쓰러져 피 흘린 자에게 들리던 탄식은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 눈을 뜰 줄 몰랐으니 한숨의 의미도 몰랐던 거지. 우리는 결국 다 함께 일어난다는, 다정하게 들리는 저 천사의 탄식!
(중략) ... 이제는 생애의 성사를 받을 시간. 수많은 죄와 회한을 기쁨으로 바꾸어주는 당신께 다가간다. 지는 노을 속에 자욱한 영혼들, 천천히 날아오르는 오, 부끄러운 내 몸.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경험할까. 팬데믹을 거친 의사이자 작가인 시인이 지켜 본, ‘숨은 쉬고 살았던가, 절망하던 탄식의 날들/시간 조금 지나면 텅 빈 병원 옥상에 올라가/입고 있던 가운을 조금씩 찢고 또 찢었지./눈물이 배 속부터 터져나오는 경험도 하면서/그해에 내가 찢은 가운은 몇 개쯤 되었을까’(노을의 주소, 62p) 셈하던 이별들은, 떠나간 사람들의 잔상을 그리면서 그가 마침내 들은 것은 천사의 탄식이었으니, 기도는 귀 기울이는 것, ‘어렵고 무서운 결단’으로 ‘정성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 이슬같은 눈물, 이슬같이 받아먹고 탄식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우는 일이다. (『천사의 탄식』, 마종기 지음, 문학과 지성사, 값 9,000원)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