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은 불러 보았다.
(정회옥, 위즈덤하우스, 2022년)
세상에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항상 호불호를 가지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편견과 차별은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한두 번의 인상이 굳어지고, 개인에 대한 판단을 넘어 그 사람이 속한 지역, 민족, 인종, 계급이나 지위, 종교에 대한 판단으로 굳어지면 그때부터는 뭐라 해도 듣지 않고 굳어진 자기 신념에 따라 사람을 대하게 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사람이 속한 부류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단적 편견과 차별을 정리한 책을 소개한다. 이 책은 굳이 내용에 들어가지 않고 목차만 해설해도 차고 넘친다. 편견과 차별은 미움과 증오가 전부가 아니라 선망과 찬양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현대 한국 100년은 분명히 미국과 함께였다. 단지 경제만 아니라 정치, 제도, 안보, 교육과 학문, 정신과 종교까지 거의 모든 것을 미국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우선 ‘미국을 찬양하라’다. 그러나 같은 미국인이라도 질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의 등급은 ‘흑인보다는 낫지만, 백인보다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에서 배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인종 개념의 위계화와 사회진화론’이다.
여기서 일본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현대 한국 100년을 깊이 물들였다. 우리에게 일본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망하게 한 식민 침략자이지만 한편 지긋지긋한 동양의 저주에서 벗어날 모델을 보여준 선진국가다. 그 가운데 후자에 대한 꿈을 심어준 게 바로 뉴라이트 운동이고, 지금 윤석열 정부의 한미일 동맹이다. ‘망국의 학생들에게 각인되는 열등감│과학으로 ‘증명’된 열등한 피│민족 개조와 인종 전쟁’ 등이 이를 보여준다.
해방은 되었지만 현대 한국의 삶은 공포와 염려,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짧은 시기에 우리는 분단, 전쟁, 가난과 독재를 계속 겪어왔다. 그 무서운 위협 앞에서 한국인들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강해져야 했다. ‘반공주의로 날을 세운 공격성’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한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라’ 그리고 무서운 생존 욕구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공격을 동반했다. ‘불안한 삶이 낳은 타자 혐오’ ‘한국 찬양과 타국 폄훼’
그것은 ‘피부색, 민족, 경제력, 종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노란 피부, 하얀 가면’을 뒤집어쓰고, ‘백색 신화’에 빠졌다. ‘지배당한 자의 흑인 혐오’는 깊어 ‘흑형’이라 부르며 멸시한다. 그러나 21세기를 들어 우리의 제1의 혐오대상은 더는 일본도, 흑인도 아니라 ‘짱깨’(중국)다. 요즘 내가 일한 택배 경험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오마이 뉴스에 연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택배 현장에서 만나는 중국인에 대한 깊은 혐오를 바탕으로 전반적인 차별의식에 대해 썼다('중국인은 괜히 싫다'는 사람들에게... 제가 겪은 일입니다. https://omn.kr/25lgr).
그런데 내 예측보다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미움이 정말 대단했다. 내 글은 다른 차별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45개의 댓글 대부분이 오직 중국에 대한 것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중국 혐오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현대 한국의 힘겹고 살벌한 역사에서 ‘빨갱이라서, 미제의 앞잡이라서, 베트콩이라서’ 사람과 사람을 학살해 온 사건들을 주목했기 때문에, 다시 그 공격대상이 중국(인)으로 바뀐 게 아닌가 싶다. 가볍게 보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먼저 이를 고심해 주기 바란다.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보면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개인적 혐오와 증오심이 어떻게 전체 유럽을 뒤집어 놓는지 그 씨앗을 볼 수 있다.
21세기 한국의 또 다른 혐오는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이주노동자인 ‘똥남아’로 이어진다. 그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사람이 죽는’데도 언론 매체는 ‘인종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이 소개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 그리스도인과도 깊이 관련된 ‘개슬람’ 곧, ‘무슬림을 향한 자동화된 혐오’다. 그들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유럽처럼 망한다며 난민도, 무슬림도 다 반대한다. 책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더 쓴다면 나는 분명히 두 항목을 더 넣겠다. 이는 우리와 다른 민족, 인종, 종교 차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것이다. 첫째, 장애인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다리를 저는 ‘찐따’, 우는 어린애를 잡아간다는 ‘문둥이’들은 모두 ‘병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상하게 부르지만, 장애인이 집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올 때 우리의 숨은 차별은 적대적으로 변한다. 장애인의 교통권 시위에 대한 반응을 보라. 마지막은 불분명한 지역감정이 아니라 분명한 호남차별이다. 유독 한 지역을 둘러싼 나머지 지역들의 조리돌림을 우리는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 참고로 나는 서울 사람이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