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부 하나님
(<탕부 하나님>, 팀 켈러, 두란노, 2018)
이 책은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주제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부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구성과 등장인물이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깊고 넓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하여 먼 나라로 가서 쾌락을 위해 다 탕진해버립니다. 후회 막심했던 둘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아버지는 탕자인 둘째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그리고 이에 불평하는 맏아들을 타이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라 부르지만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라고 기록합니다. 어쩌면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고 함이 옳은 듯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들어가는 말 다음에 바로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는 주제를 달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다른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앞의 부류는 둘째 아들, 뒤의 부류는 첫째 아들에 해당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상대를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몹시 화를 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를 둘째 아들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첫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결국 탕자의 비유는 탕자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탕자이기는커녕 성경대로 사는 모범생인 줄 아는 종교적인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에까지도 상처를 주며, 결국 가장 불쌍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고 맙니다. 종교적 도덕주의 그래서 종교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치명적인 영혼의 병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주 모범적인 그러나 생각보다 강퍅한 심령을 가진 형들이 많습니다.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살아가는 둘째에 대해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면 아버지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착실한 것 같았던 첫째가 화를 내며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문밖에 나가서 같이 들어가자고 타이릅니다. 아들은 거부합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첫째 아들로 인해 마음이 상합니다. 두 아들을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 보면 둘 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밖으로 나가서 사랑의 잔치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형을 아버지의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그의 악이 아니라 그의 의입니다. 그가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버티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의’ 또는 ‘도덕적 교만’ 때문입니다. 어떻게 ‘의’가 아버지에게로 가는 방해물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의로움으로는 결코 아버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즉 십자가의 보혈과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두 아들 다 아버지를 이용해서 자기 욕심과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식들을 향해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탕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너무도 귀한 것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그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기철(응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