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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10-10 01:28
   
아름다움 속 정신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며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28 [99]



아름다움 속 정신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며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바실리 칸딘스키, 열화당)

 

“그림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문자나 문장보다는 이모지, 이미지, 짤, 이미지의 연속인 영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고흐, 모네, 클림트 같은 누구나 알법한 명화가 핸드폰 케이스와 노트 디자인으로 소비되는 것 이상의 그림, 회화작품을 하나 라도 진중하게 본 일이 있는가 뒤돌아본다면 2023년을 살아가는 문명인, 문화인으로서 자격미달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특히 기독교는 서양미술의 근간이 아니던가. 지나친 성상의 시기를 제외한다고 해도 기독교 역사에서 그림은 신앙고백의 수단이자 말씀의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해 주는 보조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반카톨릭주의자들처럼 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모든 곳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다. 영적인 것과 진정한 아름다움의 추구 속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분명히 있다. 세상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것은 이 세상에 없으며 우리가 느끼는 순수한 아름다움 안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하나님의 감탄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현대인들은 예쁜 것에는 후하지만 아름다움에는 박한 경향이 있다. 한 순간에 눈을 사로잡는 예쁘장한 것들, 소비성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이왕이면 다홍치마처럼 생각하는 한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특히 박하다. 특히 개신교는 담백한 정서와 말씀에 집중하는 경향 때문인지 몰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감각이 둔해진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이성을 뛰어넘고 논리를 뛰어넘어 압도적으로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어렵게 읽고도 아직 전부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책을 추천하는 것은, 함께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자는 권유이기도 하다. 단순히 보고 “와, 예쁘다.”는 감탄으로 끝나지 않고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으로 더 깊은 호흡으로 아름다움을 느껴보자는 권유다. 

 

  ...그리고 다시 예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상생활에 파묻혀 버린다. 그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고통과 의심과 열광과 영감에 차 있는 온갖 삶이 이 모든 그림 속에 신비스럽게 담겨져 있는 데도 말이다. 이러한 삶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창조에 몰두에 있을 경우, 예술가의 영혼은 어디를 향해 외치고 있는가. 예술가가 알리려고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불을 비춰 주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임무이다.”라고 슈만(Robert Schumman)은 말한다. (21p)

 

...물질주의가 지나간 후, 이제 막 깨어난 우리의 영혼(Seele)은 아직도 불신과 무목적에서 오는 절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 (중략) 휩싸여 있는 이 어둠이 진정 현실인가 하는 회의 속에서 영혼은 이 빛을 직시하려는 용기를 못 내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물질주의 철학에 대한 회의와 억압을 느낌으로써 ‘원시인’과 분명히 구별된다. (22P)

 

 세계대전과 산업화 시기를 지내며 화가 칸딘스키는 영혼이 결여된 회화들에 일침을 가하며 보다 정신적인 것, 영혼과 깊게 관련된 순수히 예술적인 것을 어떻게 구가할 것인지를 정리한 이 책은 서두부터 예술이, 특히 회화가 어떻게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과 연결되는지를 말해준다. 사실 중간 부분의 회화론은 일반사람들이 읽기에는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내적 음향과 형태, 색채론에 대한 칸딘스키만의 이론과 평론은 직접 도판을 확인하며 읽지 않는 이상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활동, 내적인 필연성, 그같은 회화들이 영적으로, 아름다움의 추구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고민하며 던지는 문장들은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건반을 두드리는 손과 같다. 그러므로 색의 조화는 오직 인간의 영혼을 합목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칙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62p) 

 

 그의 열린 눈은 그의 내적 삶의 방향으로 돌려져야 하며, 그의 귀는 항상 내적 필연성의 언어에 향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비적 필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수단은 내적, 필연적일 때 신성하다. (63P)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공허하게 사라질 사물들을 맹목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목적이 있는 힘이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발전시키고 순화시키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 예술은 자기 고유의 형식으로써 사물에서 영혼에 이르는 말을 주고받는 언어요, 또한 영혼이 이런 형식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나날의 양식인 것이다. (128p)

 

 칸딘스키의 예술가로서의 지침은 때때로 목회자의 마음가짐이나 사도의 마음가짐과 비슷한 결을 지녔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단순히 예쁜 표현에 머무르려는 것이 아닌, ‘내적 음향’과 “내적 영혼의 필요성”에 귀기울이는 태도에 근거한다.

 예술의 모든 형태 중 글은 가장 단단하고 정제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글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때때로 목회자들은 이 단단하고 정갈한 말씀에만 매몰되어 실은 이 말씀이 로고스Logos이며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며 또한 영혼임을 잊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영혼’이며 ‘아름다움’이다. 이성으로서의 신학, 논리적인 신앙의 구조에 창조의 미, 영혼의 아름다움을 불러내려면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칸딘스키가 발견한 색체, 형태, 구조 속의 비범한 영적인 아름다움을 배워보며 좀 더 풍요로운 예술적 신앙생활을 가꾸기를 바란다.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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