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회복을 위한 대안을 찾아서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 앨런 크라이더, 김광남, IVP, 2021>
필립 얀시의 책 제목처럼 교회는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다. 나의 사랑인 것은 교회를 통해 나는 구원을 경험했고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는 늘 나에게 실망과 고민을 안겨줬다. 성서를 통해 기독교적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교회 안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성서에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너무 문자적이지 않으냐는 말과 너무 진보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타인의 비판은 견딜 수 있었지만 말씀과 내 삶의 괴리를 발견할 때 자신에 대한 성찰이 더 힘들고 괴로워 교회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신앙적 목마름이 더 컸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교회의 강단으로 가까이 갈수록 신앙과 멀어진다고. 교회의 중심부로 들어가면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이 되었다. 교회의 행정과 정치는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랐고 교회의 어른이라는 이들의 삶은 실망스러웠다.
청년 때는 교회를 한동안 떠나기도 했고 목회자가 되어서는 교회갱신을 위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성서는 왜 침묵하고 기독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할까에 대한 해답을 앨런 크라이더의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를 통해 볼 수 있었다.
크라이더에 따르면 초기교회는 오늘날 교회처럼 전도와 선교라는 명목 하에 교세를 확장시키는데 몰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1세기 기독교는 그리 매력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교조인 예수는 십자가 형틀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로마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유대종파의 일종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자국에서도 배척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원수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이런 삶은 당시의 사람들과 다른 삶의 형태여서 조롱받기도 하고 핍박까지 받았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특별히 산상수훈)을 포기하지 않는(인내) 모습에 교회 외부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1부 성장과 인내)
초기교회는 성장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형태의 적극적 전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들을 감동시켰다. 예수의 가르침, 특별히 산상수훈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키웠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입문과정에서 떨어져 나갔다.(2부 발효)
초대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한 교리 교육과 세례의 과정이 있었다. 그 기간은 약 3년 동안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에 입회하려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졌다. 그리스도인으로 훈련되는 과정은 후원자들을 통해 격려와 책망을 받으며 성장되었고 인내와 실천이 아비투스라는 습관으로 형성되었다. 세례 후에도 예배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견고한 아비투스를 몸으로 익히게 되었고 단독자가 아닌 신앙 공동체 안에서 보호와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3부 아비투스 형성하기)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핍박받던 종교가 제국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면서 교회는 변질되었다. 그는 세례받은 신자의 집장에서 종교 정책에 접근하기 보다 그가 다스리는 사회의 일치와 효율적 통치에 기독교를 사용하려고 했다. 교회를 통해 사회를 다스리려고 했고 인내의 발효를 통한 아비투스를 형성하려 하기보다 법과 강제라는 정치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삶의 변화보다 겉치레만 바꾸면 되는 기독교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실망스러운 교회의 모습은 이미 313년 이후 이어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초기교회처럼 우리는 교회성장에 목을 메기보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와 신앙교육은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기 보다 살아내는 일에 몸부림쳐야 한다. 그것은 교리적 답습이 아닌 시대적 문제에 대한 신앙적 응답이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신망과 존경보다 사회적 비난을 받고 교회 안 신자는 가나안신자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교회는 어떻게 갱신될까?
“(초기)교회가 급증한 것은 이런 어부든과 사냥꾼들이 구현했던 신앙이 자신의 낡은 문화적 혹은 종교적 관습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던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중생”이라 불리는 새로운 삶으로 이끌린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요즘 한국교회는 낡은 문화와 종교적 관습을 타파하고 기후위기와 국민을 배제한 정치놀음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구현하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할 것이다. 키프리아누스의 말이 사자후처럼 울린다.
“우리는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살아낸다.”
이원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