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 전집 2-산문>, 김수영/이영준 엮음, 민음사, 2018
나에게 있어 <욥기>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서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욥기 37장까지는 좋아하지만, 38장부터 42장까지는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욥처럼 하나님을 향해 분노와 원망을 쏟아낸 적이 있었기에 욥의 말과 행동은 내게 큰 위로였다. 그래서 여전히 힘들 때마다 종종 욥기를 꺼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욥의 마음을 헤아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공감과 위로는 딱 37장에서 멈춘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38장에서야 비로소 욥 앞에 등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바램과는 다르게 욥의 분노와 원망에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욥에게 “너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라고 되묻는다. 나는 늘 하나님의 이와 같은 반응이 굉장히 폭력적이라 생각했다. 마치 하나님이 “한없이 위대한 나에 비해 너는 보잘 것없으니 불평말고 순종하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래서 니까짓 게 뭘 할 수 있는데?” 같은 느낌이랄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에 아무런 화도 내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는 욥의 모습이었다. 내가 만약 욥이었다면 나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저보고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 왜 저의 고난과 시련은 없애주시지 못한단 말이십니까!” 하지만 욥은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 나는 이와 같은 욥기의 결론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지난 두 주간 아동부 공과에 따라 <욥기>를 설교해야 해서 다시 <욥기>를 읽었다. 주석서를 참고하기도 하고 스스로 고민도 해봤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설교를 쓰면서도,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설교를 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욥기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혼자 생각해봤다. <욥기>의 저자도 결국 시련과 고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서 저런 결론을 냈던 것일까? 아니면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어떠한 시련과 절망 앞에서도, 심지어는 폭력적인 상황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을 때, 문득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된 채 놓여 있던 <김수영 전집 2-산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그 책 속에서 읽었던 한 파트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책이 나에게 “어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을 읽어!”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언가에 끌리듯 김수영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를 비롯한 그의 ‘시론’을 읽기 시작했다.
김수영의 시론에 따르면 자유를 이행하는 시만이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줄 수 있으며 이러한 시야말로 진정한 시다. 이러한 자유의 이행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김수영은 침묵의 순간에 자유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수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265) (‘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모든 진정한 시는 무의미한 시이다. 오든의 참여시도, 브레히트의 사회주의 시까지도 종국에 가서는 모든 시의 미학은 무의미의 – 크나큰 침묵의 – 미학으로 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본질이며 숙명이다”(461)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렇다면 어떻게 침묵에 도달할 수 있는가? 김수영에 따르면 기존의 의미가 작동하기를 정지할 때, 말이 말하기를 멈출 때 가능하다. 김수영에 의하면 외부에서 부과한 관념에 의지한 말들은 모두 ‘소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501) (‘시여, 침을 뱉어라’).
침묵의 순간은 죽음과 같다. 왜냐하면 김수영에게 침묵이란 내가 알던 세계가 지워지는 것이며 죽음이란 기존 세상이 소멸하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는 사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이 침묵 이후에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이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며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움을 보여준다.
김수영의 시론을 읽고 나니 문득 욥의 마지막 장면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이전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자신이 하나님에게 내뱉었던 말들이 모두 “지루한 횡설수설”이자 ‘소음’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백 이후 욥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해와 언어가 ‘소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욥이 다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42:4)라고 말하기까지는 긴 침묵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긴 침묵을 깨고 욥이 다시 말했을 때, 그는 이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뒤였을 것이다.
새롭게 변화된 욥은 더 이상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사 6:5), 욥은 죽음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그의 이전 세계는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워졌기에 욥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욥 42:6)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욥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욥의 말과 행동은 납득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체념도 아니고, 믿을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신뢰한 것도 아니다. 욥이 보여준 말과 행동은 가장 진지한 시이자 진정한 고백이다.
이제 욥과 김수영이 내게 묻는다. 너는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고. 오히려 너야말로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욥 42:3 공동번역)가 아니냐고. 지금 이 순간 지루한 횡설수설을 멈추고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냐고. 너는 죽을 수 있냐고.
이 묵직한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여인들처럼 몹시 떨며 무서워할 뿐이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라면 누구도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으며 결단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김윤형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