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정의 없는 평화 없고 용서 없는 정의 없다>, 장 바니에, 다른우리, 2013)
우린 어떻게 하면 다양한 생각과 문화와 종교와 신념을 가진 이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공존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양한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공동체를 다양한 빛깔로 활기차고 풍성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갈등과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하면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안고 장 바니에(Jean Vanier)의 <정의 없는 평화 없고, 용서 없는 정의 없다>를 집어 들었다.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아 공동체와 평화에 관한 깊고도 풍성한 통찰을 전해주고 있다.
장 바니에는 1964년 발달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라르슈(L'arche) 공동체를 설립하고, 1971년에는 발달 장애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섬기는 기독교 자선 단체인 신앙과 빛(Faith and Light)을 설립했다. 그는 평생 평화와 공동체의 문제를 안고 씨름한 학자요 운동가이다. 장 바니에의 글이 힘이 있는 것은 그가 평생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며 얻은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평화에 대한 메시지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고, 답답한 현실에 씩씩거리던 마음을 이내 차분하게 만들었다.
<정의 없는 평화 없고, 용서 없는 정의 없다>는 장 바니에는 2001년 9월 11일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9.11테러’ 이후 전 세계에 고착화된 증오와 혐오, 그에 따른 수많은 갈등과 폭력의 실상을 경험한 이후 자신과 세상 안에 있는 폭력의 원인들과 평화의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지나온 삶을 상기하며 기록한 성찰의 산물이다. 그는 평화를 만드는 일이 일부 특정한 사람들의 몫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의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평화는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평화를 위해 복무하는 이들이 하나 둘 피워낸 꽃밭의 향기와 같다. 평화는 이렇듯 천천히 스미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또 살아가야 할 평화 없는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고 하는 소중한 초대장이다.
평화의 주제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라. 진리는 왜곡되고, 거짓이 횡행하고 있다.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진리의 왜곡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며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진리의 왜곡은 의심과 갈등을 유발하며 결국 관계의 파탄까지도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진리의 편에 선 이들도, 거짓을 추종하는 이들도 서로에 대한 미움이 싹터 평화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평화가 사라지는 순간 감정적인 분탕질만 남을 뿐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나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이 모순을 우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갈등이 첨예한 부조리한 현실에서 우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평화에 대한 담론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약점 많고 불안해하며 공허해하고 불만족해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우린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렇듯 우린 허물과 상처투성이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참된 자아를 찾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변화에 대한 갈망, 평화는 이 지점에서 싹이 튼다.
변화를 위해 갖추어야 할 태도가 바로 자기개방성이다. 우린 자신이 언제나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견고한 틀을 언제든 깰 줄 아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자신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바뀌기를 바라는 태도는 관계의 장벽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안에 어떻게 평화가 자리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개방하는 이들의 특징은 ‘대화’이다. 대화는 평화를 만들어내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된다. 대화는 자신을 여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마음은 열려지고 이를 통해 진실한 관계맺음이 이루어진다. 공동체 내에서 진실한 관계가 형성되면 그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진실한 관계는 자비의 실천을 통해 유지되고 공고해진다. 자비와 사랑은 종교의 핵심이자 평화를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자비와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종교, 문화, 인종, 신념 등의 장벽을 뛰어 넘는 것이다. 사랑은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평화가 깨지는 것은 누군가 남들보다 우월한 힘을 갖고 있다 여기는 데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누구나 힘을 갖고 있으면 과시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속성이 있다. 우린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함에 있어 모두가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불어 나와는 생각과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달라도 그를 나의 생각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진다.
장 바니에는 인류가 겪었던 아픈 상처들을 끄집어내며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문제를 거론한다. 바로 용서의 문제이다. 용서라는 감정은 우리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보복심, 절망, 분노 등은 갖지 않으려 해도 불쑥 고개를 내밀어 마음을 휘저어놓는다. 인간의 본성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용서는 우리의 의지적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장 바니에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은 .. 그분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105쪽)하다고 말한다. 상처 입은 우리에게 주님은 용서와 사랑의 선물을 주신다. 우린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이다. 장 바니에는 말한다. “용서는 우리의 지난 상처들을 치유하도록 내려주시는 그분의 선물입니다.”(104쪽) 용서는 나와 상대방 모두의 상처와 응어리들로부터 해방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용서를 통해 출구가 없던 우리의 삶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다. 그 길은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
정의와 용서를 통해 관계가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에 깃든 평화는 이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평화를 일구는 자로 적극 나서게 한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험담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겪는 불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잘 되고 자유를 얻도록 기원하고 기도로 그들을 품어주는 넉넉한 품이 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갈등과 분열로 거친 숨소리를 내쉬고 있다. 평화의 사람이 절실하다.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희생어린 열정과 더불어 우리 내면의 평화를 찾는 일을 우린 잊어서는 안 된다.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을 잃지 않는 가운데 갈등의 현장에서 평화에 성실히 복무하기를...
이혁 목사 (의성서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