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땅의 야수들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다산책방, 2023
사람들은 감동적인 이야기에 열광하고 늘 새롭고 강렬한 서사를 갈망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영화와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뿐 아니라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인생의 깊은 의미와 통찰을 전해주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나면 깊은 감동과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매력이다. 최근 읽은 김주혜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이 내게 그러했다.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은 강렬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제목과 한반도를 웅크린 호랑이의 모습으로 디자인한 책 표지가 그러했다. 이 책은 사냥꾼 이야기로 시작된다. 1917년 거대한 산과 위대한 자연 속에 하나의 점과 같은 한 사냥꾼이 호랑이를 추적하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작은 땅인 한반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작은 거인들이 어떻게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사랑을 꽃 피웠고 나라를 위해 싸웠으며 그들의 깨어진 인생을 보석으로 빛나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픽션인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작은 사람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사냥꾼, 기생, 인력거 인부, 거지와 깡패, 독립운동가, 예술가와 사업가, 일본인 장교들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이 소설은 이 사람들이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운명을 개척하고 절망을 극복하며 살아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운명을 어떻게 빚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소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을 쓴 김주혜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한국, 그리고 그가 살지 않았던 일제침략기와 근대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이토록 상세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이야기를 구성해 나갔다는 것이 참 놀랍다. 그가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자료를 연구하고 또 공부했는지 그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특히 비극의 역사를 품고 있는 한반도를 향한 깊은 애정과 그 속에 살아가야 했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 그리고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 사랑의 아름다움과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삶은 참 감동적이다.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록 비극적인 역사 속에 버려진 작은 땅의 작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작지 않았고 그들은 연약하지 않았으며 강하고 용감한 호랑이와 같은 야수들이었다고 계속해서 말한다. 책의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기회주의적 사업가 이토 아쓰오가 등장하는데 그는 1944년 일본의 패망이 가깝고 전쟁의 종식을 앞둔 시점에 창경궁에 죽어가는 동물들의 가죽을 사서 일본에 팔 생각하면서 주인공인 옥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랑이만큼은 정말이지 놓치고 싶지 않아. 일본에는 그처럼 사나운 맹수가 없거든, 영토로 따지면 우리가 훨씬 큰 나라인데도 말이야. 이 작은 땅에서 어떻게 그리도 거대한 야수들이 번성할 수 있었는지 신비로울 따름이야.” (513쪽)
그리고 작가는 주인공 옥희의 생각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옥희는 오래전 자신의 산골 마을에서 보내던 밤들을 떠올렸다. 칠흑 같은 어둠은 굶주린 동물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고, 눈 내린 다음 날 아침이면 초가집 둘레를 포위하듯 어슬렁거리다 돌아간 그들의 발자국들도 자주 보았다. 그러나 야수들은 결코 옥희를 두렵게 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행동으로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언제나 인간들이었다.” (514쪽)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작은 땅의 야수들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잔혹한 폭력과 야만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결국 자유와 독립을 지켜낸 한반도와 한국인들이다. 유명 정치인이나 힘 있는 장군들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진 작은 소시민들이 이 땅을 지켜낸 호랑이와 같이 용맹한 진정한 야수들이라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깊은 여운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단어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문장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이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감싸고 있는 광대하고 경이로운 대자연과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웅장하다. 등장하는 인물들인 옥희, 연화, 월향, 은실, 정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매력적인 이야기 속에 푹 빠져서 나도 산과 들을 거닐며 깊은 산의 소나무와 용맹하지만 연민과 웃음이 가득한 호랑이와 대화하고 제주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바다의 풍경을 거닐며 미소 지었다.
모래 한 알 같이 작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보석을 빚어가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주인공 옥희가 노년에 제주 해녀가 되어 처음으로 전복을 잡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 계속 마음 속에 메아리친다. “껍데기에서 전복을 빼내려는데, 칼날이 말캉말캉한 살 속에 감춰져 있던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은은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완벽한 구체. 내 손바닥 위에 놓은 그것은,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 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603쪽) 역사와 인생의 거칠고 깊은 바다에서 피어난 빛나는 진주 한 알! 그것은 빛과 어두움, 사랑과 욕망, 믿음과 배신, 연민과 폭력, 행복과 불행, 정의와 불의의 모래가 전복의 살을 뚫는 고통을 통해 빚어낸 찬란한 인생의 보석이었다. 아프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인생의 진주, 그것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최명관 목사 (혜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