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만나, 그 사계절 이야기
(<은혜를 입다, 은혜를 잇다> 김진호 저, IVP, 2023)
글에는 지문이 묻어있다. 글에는 그 사람이 담고 있는 독특한 성품과 지향점, 그러니까 맛과 멋이 드러난다. 그래서 글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글의 묶음인 책은 한 사람의 복사판이다.
여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있다. 강원도 영월에서 할매들과 어우러져 목회하는 젊은 목사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묵상과 목회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사계절이 변화하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만나고, 느끼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통해 체득된 울림있는 이야기가 에세이 형태로 녹아져 있다.
김진호 목사는 부산의 한 교회에서 청년목회를 했다고 한다. 학업과 취업으로 말씀 묵상은 저 멀리 팽개쳐놓고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어떻게 하면 한 번의 주일 메시지로 승부를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선택한 전략이 말씀의 밀도를 높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설교 원고를 졸이고, 또 졸여서 엑기스를 만들고, 그 핵심 문장을 한 단어로 라임(rhyme)을 만들어 전달하던 것이 이 책의 재료가 되었다.
너그럽게, 너 그렇게
우리의 탐심은 하나님의 탄식
나의 삶, 주와 삶
기도氣道를 확보하듯이, 기도祈禱를 확보합시다
믿음은 궁서체, 사랑은 광수체 등
50편이 넘는 이야기 속에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내용은, “은혜를 입다, 은혜를 잇다”(39쪽)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김진호 목사는 일 년에 딱 한 번 입는 양복이 있다고 한다. 이 양복은 목사안수를 앞둔 시점에 한 성도로부터 받은 양복이다. 이 성도는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한 초짜 전도사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표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던 인물이었다.
“김 전도사, 내가 김 전도사 목사 안수받을 때, 서면 롯백(롯o백화점)가서 양복 한 벌 해 줄게.”(41쪽)
하지만 사람 일을 누가 알겠는가? 사장으로 회사를 잘 경영하던 성도는 갑작스런 위기에 부도가 났고, 결국 건강까지 상해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 목사 안수가 가까워진 시점에 교회 사무실에 양복 한 벌이 말 없이 놓여져 있었다.
‘김 전도사, 목사 안수 축하해. 약속처럼 비싼 건 아니지만.’(39쪽)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철지난 양복을 구해서 사무실에 놓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듬해 봄, 안수식 때 입으려고 세탁소에 수선을 맡기는데 세탁소 사장님이 “누가 이런 빤짝이 양복을 입는대요.” 혀를 찼다고 한다.
목사 안수식, 저 멀리 기둥 뒤에 몰래 숨어서 바라보고 있던 성도와 눈이 마주치고 따라가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순간 울리는 문자 벨소리.
‘김 목사님, 목사 안수 축하해요. 꼭 보고 싶었어. 아울렛에서 산 양복도 잘 어울리네요. 다음번에는 꼭 백화점 갑시다. 아! 그리고 앞으로 반말 안 할게요.’(41쪽)
김진호 목사님은 그때 받은 이 양복을 일 년에 한 번 꺼내입고, 목사 안수 날의 떨림과 성도의 사랑을 기억한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이런 먹먹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사계절의 변화와 한 목회자의 성장이 짝을 이루며 흘러간다. 시골 할매들이 보여주는 투박하지만 뜨거운 사랑 이야기,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는 이야기, 막막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만지심을 경험하는 이야기 등이다. 본서는 잘 익은 김치 같다. 새콤하고 풋풋하지만, 깊게 숙성되어 시원한 맛이 난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진실하게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위로와 도전을 동시에 받는다. 덤덤하게 적어간 저자의 이야기가, 은혜를 무심코 흘려보냈던 나의 일상에 파장을 일으킨다. 제목이 ‘하루 만나’ 인 것처럼, 우리는 매일 쓰러지고, 넘어지는 일상 속에서 또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난다.
은혜를 심비(心碑)에 새기지 못하고 물에 새겨 쉽게 희석되어버린 우리의 일상에 깊은 물음과 돌아봄이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기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신동훈 목사 (마포 꿈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