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2022)
이 책을 나는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 ‘근대 사회학의 원조가 쓴 고전. 사회학을 넘어 정치, 경제, 종교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향력.’ ‘그러나 막상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심한 의도적 왜곡에 둘러 쌓인 책.’ 이 책을 읽은 후 솔직한 내 소감이다. ‘앞부분’이 이 책에 대한 찬사라면 ‘뒷부분은’ 이 책에 대한 잘못된 활용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제법 많다.
참으로 근대 이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야기하는데 그는 마르크스와 함께 항상 함께 언급될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책을 폄하하고, 반대로 마르크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대개 그를 독보적인 인물로 추앙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학문으로 확인해 준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엄청난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특별히 마르크스보다 50년쯤 뒤에 태어난 베버는 그를 크게 평가했고, 그의 학문적 업적도 존중했다. 베버의 문제의식은 근대 자본주의가 활발하게 태동된 지역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이한 현상으로부터 시작한다. “한 가지 현상이 주목할만한 정도로 눈에 띄는데, 그것은 자본가와 기업가는 물론이고, 고급 숙련 노동자층, 특히 기술 분야나 상업 분야에서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서 근대적인 기업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개신교도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43쪽)
여러 지역, 오랜 시기를 유심히 관찰할 때 일관되게 발견되는 현상이 있었다. 곧,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청교도적 개신교의 독특한 사고로 무장된 사람, 또 대표적 지역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활발하게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일으킨 시대정신은 마르크스 이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기만 살겠다고 돈밖에 모르는 비인간적이고 파렴치한 재벌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검소, 절제, 정직 등의 금욕적 도덕관념이 그들의 생각과 삶을 지배했다.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믿음의 행위들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다. “칼뱅주의를 신봉한 ‘성도들’의 삶은 오로지 초월적인 목표인 ‘구원’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들의 현세적인 삶은 이 땅에서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유일한 관점의 지배 아래에서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조직되었다. … 이렇게 현세적인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게 되자, 개혁교회 신앙은 독특한 금욕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216쪽)
이는 16~18세기까지 칼뱅주의에서 직접 이어진 장로교만 아니라 청교도적 감리교, 예정론적 침례교 등 다양한 교파를 믿는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영국과 미국 등 광범한 지역에 초기 자본주의가 뿌리내리고 발전하는 정신적 토대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마르크스가 비분강개하여 자본론을 쓰게 했던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자본가의 비도덕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놀랍게도 베버는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칼뱅주의적, 청교도적 초기정신이 벌써부터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제 역사 속에서 승리해서 하나의 강력한 틀과 기제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자본주의는 금욕주의라는 지지대가 필요하지 않다. … ‘소명으로서의 직업’ 사상도 옛 종교와 신앙의 망령이 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서성이고 있을 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375쪽)
상당수의 기업가, 자본가는 현실적인 동기 이전에 종교적이고 구원론적인 이유로 세상에 보내신 직업적 소명에 헌신했고 그 결과 자본을 축적하고 자본주의 제도의 기초를 놓아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본궤도에 들어서고 자본축적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신앙적 동기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지고 불필요한 간섭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후 자본주의는 독점을 넘어 세계시장 획득을 위한 제국주의로 발전했고 두 차례 세계대전의 내적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베버의 이 책을 읽는 바른 독법은 많은 부흥사처럼 자본주의가 청교도 정신으로부터 출발한 우수한 제도이니 더 발전시켜 믿음과 부유함을 더 많이 소유하자는 욕망 자극의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소명과 근면한 생활조차 소유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얼마나 무분별한 왜곡과 불신앙에 빠질 수 있는지 재차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이 책을 다시 정독해야 할 이유다.
구교형 목사 (성서한국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