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논리로 푼다는 진짜 의미에 대해서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마르틴 하이데거, 길, 2017)
믿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다보면 수많은 벽에 부딪힐 때가 많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는다면 인생을 논리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다. 자신의 인생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종교를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게 된다면 많은 순간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신학을 공부했어도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답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에 논리적 토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종교를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신앙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류학의 관점이나 시장의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례로 짧은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주일예배가 1부, 2부를 넘어 저녁예배까지 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매 예배마다 헌금을 걷는다는 이야기에 쉽게 수긍한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논리’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흔히 논리적이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문장의 구성요소가 충분하고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는 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 하이데거의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은 앞서 말한 ‘논리’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준다. 새로운 관점이라는 것은 논리학을 언어학이나 논법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푸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유명한 말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논리학을 형이상학으로 푸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노력은 언어가 우리의 사고체계를 표현하고 현실을 어느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지를 표현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즉, 존재해명의 문제를 하이데거는 언어를 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평의 제목인 “인생을 논리로 푼다”는 진짜 의미는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언어로 나의 존재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지를 푼다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세계와 사고를 표현한다면 그 성질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논리의 의미가 합리와 효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충분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 지점에서 우리의 신앙과 연결하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이다. 물론 이걸 하이데거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머지는 우리의 몫일 지도 모른다. 논리학을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본다는 것과 우리의 신앙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필연적인 신에 관한,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인가? 신앙도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연관을 가진다는 점에서 인생을 푸는 논리고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경우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