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게시판
바이블25
크리스천라이프
커뮤니티
갤러리
성경/찬송가
지역정보
로중
전도
뉴스
QT
전도모음
Cristian YouTube
     
커뮤니티
칼럼
명언묵상이미지
하늘양식
오늘의책
십자가
명상
영상
설교
말씀
독자편지
독자편지 [70]
 
 
 
     
 
 
 
작성일 : 23-12-26 00:16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글쓴이 : dangdang
조회 : 1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603 [71]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기러기>, 메리 올리버, 마음산책, 2021)

 

“괴물은 누구-게?” 얼마 전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는 두 아이가 반복해서 이 노래를 부른다.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이 노래 가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노래 가사를 곱씹다 보니 자연스레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생겼다. 영화의 내용을, 또 현실을 돌아보면서 나는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류 역사 속에는 언제나 괴물이 존재했다. 여성, 장애인, 병자 등 괴물에 속하는 집단은 바뀔지언정 ‘괴물’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런데 진정한 괴물은 누구인가? 타인을 어떠한 잣대로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자인가 아니면 타인에게 괴물이라고 규정당하는 자인가?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타인을 자신 혹은 사회의 잣대로 판단하고 규정하면서 타인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가 괴물 아닌가? 그런 인간이야말로 스스로 하나님이 된 오만한 인간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예수님 시대에 ‘괴물’ 혹은 ‘죄인’이라고 규정당한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므로 괴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다음날, 나는 버스에서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를 들으면서 교회를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나만의 잣대로 타인을 괴물로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괴물>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말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자들이 괴물이다’일까? 그는 인간 내면의 다양성과 복잡성, 인간의 이해와 인식의 한계를 보여줬던 것 아니었을까? 아니면 괴물이 누구인지 찾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게다가 내가 생각한 신학적 관점이나 신학적 근거 역시 내 생각에 불과한 것 아닌가? 결국 나도 내 주장을 위해 하나님을, 예수님의 삶을, 신학을 내 입맛대로 규정하고 사용한 것 아닌가?”

 

 위와 같은 생각을 하니 쉽사리 무엇인가 말하고 행동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태도는 행동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한 나약하고 비겁한 태도가 아닐까?’ ‘이건 그저 방관자의 태도가 아닌가?’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러한 질문에 어떠한 해답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다니카와 슌타로의 <노래해도 좋겠습니까>라는 시가 떠올랐다.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방에서 홀로 당신이 신음하고 있을 때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당신의 괴로운 꿈 속에서

...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고향 잃은 당신이 길에서 웅크리고 앉았을 때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발밑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이미 내일은 없다고 당신이 침묵으로 외치고 있을 때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저물녘 오늘 빛의 반짝임을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에 당신이 등을 돌렸을 때

노래해도 좋겠습니까

사랑을, 당신과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비참한 현실 앞에 좌절하는 사람 곁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노래를 부른다 한들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 시가, 특히 ‘사랑을, 당신과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라는 문장이 내 눈에 밟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이 문장을 생각하니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노래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지만 쉽게 절망에 빠지지 않게, 그렇다고 대책없이 희망만을 꿈꾸지도 않게 해준다.’

 

 그러므로 나는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노래하고자 한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부르는 가냘픈 노래는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나를 괴물로 만들지도, 타인을 괴물로 규정하지도 않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나는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를 부르고 싶다.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면 돼.

너의 절망을 말해봐,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주지.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가지.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투명한 조약돌 같은 비가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가지,

초원들과 울창한 나무들,

산들과 강들 위로.

그러는 동안에도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을 높이 날아

다시 집으로 향하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당신이라는 존재는 새롭게 태어나야 할 존재도 아니고 괴물도 아님을 잊지 마시길. 하나님 안에 언제나 당신이 있음을 잊지 마시길. 그러니 모두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마시길.’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김윤형 (청년)​ 


 
   
 

 
Copyright(c) 2012 http://bible25.bible25.com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