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이정표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정한욱, 정은문고, 2023)
“수술을 통해 빛을 찾는 목적은 단순히 나 홀로 세상을 잘보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밝아진 눈으로 죄와 고난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지.”(67)
“위대한 신앙인은 위대한 변증가였다.” 이 명제에 깊이 공감한다. 신학적 논리가 허술하다면, 그 신앙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기독교신앙, 특히 감리교신학에 있어서 이성, 체험, 전통, 성경, 이 네 개의 기둥 모두가 소중한데, 한국교회에서 가장 도외시 되고 있는 것은 단연 이성이다. 반지성주의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그림 하나가 회자되고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를 열어 뇌를 꺼내면서 말한다.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이건 필요 없을 겁니다.”
개신교의 정체성 중 하나는 성직자중심주의의 탈피다. 비성직자들이 주체적으로 교회운영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것은 신학이나 기독교변증에 대해서도 유효할 것이다. 세속에서 이방인들과 마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평신도의 언어가 더 호소력이 짙고, 더 적확할 때가 있다. 정한욱 장로의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가 그러하다.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딸이 질문을 던지고, 아빠가 그에 대한 답을 하는 형식이다. 폭넓은 독서를 기반으로 저자는 정확하게 참고문헌을 인용하며 조리 있게 자기 논지를 편다. 각각의 장이 한편의 완성도 높은 칼럼과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안전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 주요했다. 시대착오적이게도 상호 감시하는 전체주의가 교회 내에서도 작동한다. 고 김수영 시인은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괜찮아야 언론자유가 보장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말은 어째서 자기검열을 거쳐 발화되는 것일까.
기독교신앙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는 성경일 것이다. 성경독법,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물음은 언제나 시의적절하다. 성경본문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며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할 것인가, 아니면 차이를 긍정하며 이웃들을 환대할 것인가, 우리는 자주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다. 우리의 선택은 어떠한가.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는 히브리 선지자들의 예언을 거꾸로 적용하고 있는 실정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경은 마땅히 살림의 도구여야 할텐데, 살상무기로 둔갑해버린 것 같아 애석하다.
“내가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편해할 ‘놀이’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성서 공부가 놀이이기를 그치고 특정한 도그마 안에서 굳어지게 되면, 누군가를 살리는 데 사용되기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는 죽임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야.”(21)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는 꽤 방대한 주제를 다루기에 본 지면에 요약하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만, 지향점만큼은 자명해서, 일관된 흐름을 엿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을 꼽으라면 이것이다. “죄란 인간을 인간이도록 만드는 ‘생각하기’와 ‘공감하기’를 거부하는 ‘태만’의 결과라는 사실을 의미한단다.”(92) 하늘에 속했다 자신해도 신앙인은 현실세계를 살아야 한다. 공감과 연대, 정의와 자비, 이것이 신앙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공평과 정의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실천이 빠진 부활 신앙’과 ‘박해받는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가 결여된 영생에의 소망’은, 진실로 편안하고 달콤하며 심지어 위로로 가득하단다. 대가 없는 열매가 언제나 더 달콤한 법이니까.”(186)
김민호 목사 (지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