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만남과 실존적 한계의 극복에 관한 개인적 단상
(<성서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 폴 틸리히, 비아, 2021)
존재론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신앙인에게 있어서 등한시 되는 부분이다.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가 죽었다는 신앙에 있어서 위배된다. 사실상 위배된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글의 주장을 좀 더 강조하고자 과장을 해보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곧 예수의 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과 동일하게 신앙인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은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며 또한 근대철학 이후로 철학의 주제가 된 ‘주체’에 관한 사유다. 따라서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폴 틸리히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신앙과 존재론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 고찰을 통해 여전히 존재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이고, 필요하다. 신앙과 존재론이 같은 결을 간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존재론은 존재에 관한 물음이고 기독교 역사에서도 존재의 물음에 관한 답은 ‘존재 자체’로 흐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에 관한 물음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탐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틸리히는 이 지점을 착안하여서 인간이 존재 자체로부터 떨어져 소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소외는 결국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성경의 언어로 말한다면 죄와 사망의 법이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문제이며, 곧 불안이다.
불안은 비존재의 위협이다. 그런 점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 용납 받을 수 없는 자는 존재 그 자체로 인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것이 폴 틸리히의 명저 중의 하나인 ‘존재의 용기’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존재 그 자체로부터 얻는 존재의 용기는 존재 그 자체를 인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한다는 종교적 경험은 인간의 실존적 면에서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누군가는 앞서 말한 한 문장을 입증할 수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이 문장이 누군가의 한 주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앞선 문장에 대한 근거를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틸리히는 비존재의 위협으로 인하여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을 겪는 존재가 살아갈 용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용기를 어디서부터 얻는 지를 고찰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다. 인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다. 그런 점에서 틸리히 신학의 근간인 상관관계 방법은 탁월하다.
신학의 강점과 장점은 실존주의가 제기하는 물음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극히 철학적이고 냉소적인 이성을 통해 사유한다면 이 대답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 맥락에서 인간의 불안으로 인하여 인간에 대하여 냉소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문제에 대해서 신학은 인간이 처한 비존재의 위협 속에서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이러한 지점을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지 않는다면 다시금 교회는 희망이 되고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힘을 낼 수 있게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희망의 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희망을 합리화로 오해하지는 않기 바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 부분을 고찰하도록 하자.
이경우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