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꾸는 사람, 꿈꿀 권리.
(<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열화당)
꿈꾸는 사람 요셉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크리스천에게 ‘꿈’이란 요셉을 모르는 자들에 비해 더 풍성한 색채를 가진 단어여야 할 것이다. 비록 희망을 갖기는커녕 점점 잃어가고 있는 신(新)염세주의에 가까운 세상에서 꿈이란 피상적이거나 물질적인 미래를 담보하는 단어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적어도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고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요엘 2 : 28)“의 말씀을 찬양으로도 부르는 자들은 달라야 할 것이 아닌가.
사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 책은 제목에서 오는 기대와는 달리 미술이론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말로 포문을 여는 것은 결국 바슐라르가 다양한 회화 및 조각, 판화와 화가들을 이야기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꿈을 권리, 꿈을 볼 권리, 즉 꿈의 견자(見者)로서의 시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을 대강 흝어 보고 덮어 버리지 말라. (중략) 그렇다. 많이 꿈을 꾸는 것 - 인생은 꿈이고, 실제 체험한 것을 넘어서 꿈꾸는 것만이 진실하며 살아 있는 것으로서, 바로 여기 우리 눈앞에 참다운 진실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임을 의식하면서 꿈을 꾸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20P)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샤걀의 <성서> 화집을 가르키는 것이지만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저자이자 철학가인 바슐라르는 특히 샤갈과 플로콩에 많은 설명과 지면을 할애했는데 특히 샤갈의 <성서> 화집은 각 성서의 장면 삽화마다 자세한 묘사를 달아놓을 정도로 깊은 애정을 쏟는다. 그는 샤갈의 삽화로 인해 다시 한 번 성경을 읽게 되는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회화를 비롯한 예술은, 특히 우리가 ‘서양미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태반이 그러하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유럽에 여행가면 반드시 찾아보는 예술작품은 기독교 예술이 대부분이다. 물론 우리나라나 중국, 인도에 가면 다른 종교화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왜 종교가 그토록 많은 예술을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한 것이다. 믿음과 신앙에 대한 표현, 포교와 종교이론의 설파와 같은 메마른 분석도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어쩌면 ‘꿈을 꾸게 하는 일’ 이라는 생각을 했다.
짐승 가죽을 걸치고 날고기를 먹고 있었던 그런 인간의 모습을 나도 제법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것을 상상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꿈꾸지는 않는다. (21P)
역사와 정확한 정보를 통한 인류의 위대한 증명이나 인류에 대한 민간신앙격의 창조 설화와 비교해 바슐라르가 샤갈의 창세기 삽화를 보며 느낀 것은 우리가 되찾고 싶어하는 낙원의 색채와 아름다움들이다. 우리가 회복하고 싶어하고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이르를 천국의 모형들, 즉 우리가 충분히 꿈꿀 수 있을 만한 천지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책에서 ‘꿈’이란 미래의 소원을 담은 것이나 수면 중 무의식의 반영으로 떠오르는 것보다 후 훨씬 더 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꿈은 상상이며 몽상이며 생각이기도 한다. 오히려 모네, 세갈, 바로키에, 마르쿠시스 등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반복해 이야기 하는 ‘꿈’은 상상할 수 있는,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에 더 가깝다. 하지만 단순히 ‘상상’은 아니다.
꿈의 힘이 전능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의를 다하여 꿈꿀 때, 꿈의 힘의 묘선은 스스로의 규율을 따른다.(68P)
창세기의 최초의 동물들은 신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어휘집의 낱말들이다. 예술가는 천지창조의 추진력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창조한다’는 동사를 끊임없이 활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는 창조에 얽힌 모든 행복을 자기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17P)
바슐라르가 미술작품을 보며 말하는 ‘꿈’은 예술가들의 창작 작업 안에 맺혀 있는 꿈, 상상의 가능성, 화면과 시야의 가능성 흔적을 말한다. 남겨진 작품을 봄으로서 따라서 우리는 창작자, 예술가들의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기질, 의지의 격앙, 세계에 대해 작용하려는 견딜 수 없는 행위’(81P)이기도 하다. 꿈을 꾸는 것은 보는 것, 견자見者로서의 행동과 같이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망상이나 눈을 지그시 감고 비현실성을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시선, 봄(見)은 그림의 상징이나 해석, 분석을 넘어서서 작가가 집중한 “창조하는 시각(36P)"이고 ”모든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제작에 임하기 전에 저 심사숙고하는 몽상, 사물의 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몽상‘이며 ’한 우주의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탄생에 자신의 전존재를 내맡겨‘ ’빛에 대한 세계의 계시에 아주 가까이 살아가‘(42P)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허물어진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105P)
새해에는 예년보다 문화생활을 더 많이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교회만이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바슐라르가 그토록 좋아한 샤갈의 시선처럼, 시몽 세갈의 풍경화처럼 온 세상 곳곳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것을 나직하게 바라본 애정 어린 시야라도 빌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슐라르의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한 해 동안 두고 두고 도판과 함께 보며 함께 해야 할 반려 서적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
꿈꾸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극한의 어려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꿈꾸듯이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있었다. 바슐라르는 그들의 작품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우리에게 꿈 꿀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한다. 목회자 화법으로 말하자면 그 꿈은 ‘예언하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보는(요엘 2:28) 믿음을 이야기 한다. 2024년, 전망을 보기 이전에, 꿈꾸는 방법을 아는 이들의 작품을 보고, 읽으며 권리를 찾아가보면 어떨까.
세계는 아름다운 것이다. 우주는 그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기분이 좋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기뿜은 살아가는 기뿜이다. 우주는-샤갈의 제셍이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데-모든 비참함을 넘어서 행복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낙원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34P)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