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뎀나무 아래서
(<영적 침체>, 마틴 로이드 존스, 정상윤, 복 있는 사람)
이세벨에게 쫓기던 엘리야는 홀로 광야로 도망합니다. 황야의 땅 광야에서 한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자청합니다. 그 때는 갈멜 산에서의 기적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영적 침체, 그 실체라고 여깁니다. 엘리야마저 그랬으니, 평범한 우리야 어찌하겠습니까?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 다시 찬양하련다.”(시 42:5, 새번역 성경) D. M. 로이드 존스는 시인의 이 노래를 영적 침체에 대한 원인과 치료의 전형적인 노래라고 말합니다.(17)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영적 침체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쉽게 겪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게 우뚝 선 인물들 중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봅니다.(27)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향 때문에, 남들보다 영적 침체라는 질병에 걸리기 쉬운 이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나 세례 요한이나 바울이나 루터(M. Luther)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습니다.(29) 또한 신체적인 체질이나 몸의 질병 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토마스 카알라일(T. Carlyle)이나, 19세기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이 좋은 예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통풍의 고통은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또 하나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반작용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 쓰러져 있던 엘리야는 갈멜 산의 사건 후의 반작용에 놓여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아가서 또 한 가지 원인은 영혼의 원수 마귀의 존재입니다. 마귀는 기질, 질병, 반작용 등을 이용해서 성도들을 영적 침체로 몰아갑니다.(31)
영적 침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불신앙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존 웨슬리가 대서양 한 복판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 그토록 무섭게 죽음이 두려웠는데, 모라비안 형제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태풍과 폭풍우 속에서도 햇빛이 찬란히 비칠 때처럼 평안해 보였습니다. 그때에서야 그는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46) 이런 깨우침이 불신앙을 극복하는 첫 단추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봄은 영적인 눈을 뜸을 의미합니다. 마치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어 점차 세상을 바라본 장님처럼 희미한 세계가 점점 확연해 집니다.(74) 영적 침체로부터 치유의 길은 정신(知)과 마음(情)과 의지(意)를 통전하는 작업입니다. 그 과정은 첫 번째는 정신이고, 마음이 그 다음이며, 의지가 마지막입니다.(92)
이처럼 내향(內向)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것은 죄(罪)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神人合一)되었다는 것을 모른데 있습니다.(110)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은 자신 안에 있는 광명한 천사로 활동하는 거짓 자아(ego)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깊은 상처에 매몰시키며, 점점 영적 침체로 빠져들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참 자아(the Self)에 안착하게 합니다. 바울은 기질적으로 예민한 사람, 불안과 겁이 많은 사람, 천성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했습니다.(138)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나는 죽고 예수만 산다.”(갈 2:20)는 일념(一念)이 모든 영적 침체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로이드 존스의 이야기를 못 다 했습니다. 하지만 내향의 꿈을 계속 꿉니다. 센터링 침묵기도(Centering Prayer)를 권합니다. 그곳에 영적 침체의 자유만이 아니라, 내면에서 찾는 주님의 신비가 넘칩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가 먹여준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마시고, 40일 행군 끝에 만난 호렙산에서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전승영 목사 (한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