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인간에 대하여
(<믿는 인간에 대하여>, 한동일, 흐름출판, 2021)
저자는 먼저 책의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밥친구’가 되어주는 동료 교수과의 식사는 늘 즐거웠다고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이 즐거운 이유는 홀로 밥을 먹을 때처럼 허기진 것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정겨운 담소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말한 ‘밥친구’라는 단어가 따듯하게 와 닿습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친구도 없지만 밥친구는 더더욱 없는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인들 중에도 많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에게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점점 고립되고 소외되는 느낌을 가지며 패배자의 인생을 시는 것처럼 비관적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느라 그 속에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들어올 자리’ 하나쯤은 비어 있도록 하는 것도 삶의 지혜인 듯싶습니다. 사람 하나 들어올 자리조차 없이 빡빡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성공적인 삶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의 삶이 참 그립습니다. “쟤네들이랑 밥 먹지 마!” 했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다’(요 4:9)고 기록합니다. 율법은 사람과 사람, 믿는 자와 믿는 자 사이에 벽을 만듭니다. 이 벽은 차별이 되고, 차별은 갈등을 낳습니다. 차별과 갈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밥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시점입니다. 믿음의 길을 걸으면서 바리새인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 살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에 가면 분리장벽이 높게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이곳과 저곳을 분리해 놓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휴전선 철망이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런 벽은 ‘마음의 벽’으로 확대됩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목하게 한 사건입니다. 믿는 사람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벽을 통과하여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벽을 넘어 새로운 길로 가고 계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인간이 세운 벽들을 허물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저자는 ‘생의 끝자락이 가까이 오면 신은 내게 무엇을 물어볼까?’하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만이 연주하도록 신이 네게 준 악보는 어디 있는가?” 나만의 악보란 무엇일까 자문해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이 아닐까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공통의 사명은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사랑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날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사랑으로 일어서고 사랑으로 굳게 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밥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이기철(응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