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일 년 전쯤 제게 상담교육을 해 주시던 한 교수님이 ‘고독의 위로’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당시 함께 교육을 받던 교육생들 중에 그 책을 읽고 정말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진부령으로 이사를 오면서 그 책을 구입해 와서 읽었습니다. 내용은 고독이 주는 유익을 개인의 사례를 들어가며 기술한 것이었습니다. 이사를 오고 한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읽는 동안 체감도도 높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말을 삼갈 때 일반적으로 고독을 느낍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소소한 집안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전화하려고 해도 누구 하나 마땅치 않을 때, 만날 사람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을 때 고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도 않았으며, 때때마다 즐겁게 웃고 떠들 친구들이 있었는데, 막상 아무런 이유 없이 전화 한 통 시원하게 할 사람이 없다는 현실과 마주할 때 고독합니다.
그런가하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고독을 느낍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제 마음은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저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쉽사리 대화 사이에 끼어들지 못할 때, 신나게 웃고 떠들고 대화했지만 뒤돌아서면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 때 고독합니다.
고독이라는 것은 이처럼 어떤 현상을 통과하여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보통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 고독에 대해서 끝없이 반추하며 내가 왜 고독한지를 캐묻거나,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몰두합니다. 사실 이 두 행위는 모두 소극적입니다. 두 행위 모두 고독과 직면하지 않고, 고독 속에 머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고독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인내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멈추고, 즉 고독을 생각하지 않고 고독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생각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훈련된 마음의 여유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독을 생각하지 않고 고독 속에 머무는 것은, 소중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과 머무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고독을 생각하면 고독을 느낄 수 없습니다. 생각 너머에 존재하는 고독을 느낄 수 있을 때에라야 ‘고독의 위로’를 얻습니다.
저는 고독의 위로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 많은 예배 모임이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을 듣고 삶의 푯대를 수정하며 날마다 걸어갑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점검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매일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매일 머물고 있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하나님 속에 머무는 것도 소중합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의 훈육을 따라서 지혜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것도 소중하지만, 마냥 부모의 두 팔에 안겨 넓은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뽀뽀를 하며 그 순간을 누리는 것도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 안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지혜로운 생각과 판단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혹여 오늘 고독하다 느낀다면, 고독에 대한 생각을 과장하거나 고독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그냥 그대로 고독 속에 머물러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제 안에 계신 하나님이 모든 생각과 판단의 구름을 걷고 걸어 나오실 것입니다. 생각의 질주로부터 벗어나 쉴 수 있는 ‘고독’이 찾아와 주는 것, 이 또한 은총입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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