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삼십분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이사 와서 처음으로 작은 아이가 유치원 친구를 초대했습니다. 한동안 친구를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이 워낙에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보니 친구가 집을 찾아 올 수가 없어 항상 무산되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친하게 지내던 어린이집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기도 하지만 “엄마, **이가 나를 모른대.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봐요.”하고 슬퍼할 일이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는 “엄마 **이랑 용대황태빵집에서 낮 삼십분에 만나기로 했어요.”하고 자신 있게 약속내용을 이야기 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약속시간은 확실히 ‘낮 삼십분’이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너무 우스워서 키득키득 마주보고 웃으면서 “그런데 낮 삼십분은 몇 시 삼십분이야?”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작은 아이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엄마 아빠가 답답한지 “아니~ 낮 삼십분이라니까요”하고 짜증을 냅니다.
결국 토요일 오전에 낮 삼십분보다 조금 일찍 친구를 데리러 가야한다는 작은아이의 성화에 11시가 조금 넘어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가보니 초대한 친구의 엄마가 용대황태빵집에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낮 삼십분에 친구가 데리러 오겠다고 했는데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낮 삼십분의 약속이 지켜져 작은아이는 친구를 집에 초대해서 6시간 가량을 신나게 놀았습니다. 친구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번에는 또 다른 친구를 초대해야겠어요.”하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아마 또 낮 삼십분에 어딘가에서 만나기로 하겠지요?
제가 청소년이었던 시절에는 삐삐도 핸드폰도 없어서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하자고 약속을 하면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친구를 기다린 최장 시간은 3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만나기로 한 친구는 약속을 잊고 그날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누구나 그런 일을 겪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서로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저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아이의 쉬운 약속을 보면서 새삼 ‘저렇게 약속을 해도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냥 구두로만 약속을 하고 하염없이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그렇게 초대할 친구도 없는 큰아이는 “나는 친구가 한명도 없는데”하고 부러워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살 때도 좋았어요. 유빈이랑 유진이는 새로운 친구들이 많아서 벌써 나를 잊어버렸겠지”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큰 아이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내년에 새 선생님이 오실 때 꼭 같은 학년 친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자.”하고 큰아이를 달래고 잠을 청하게 했습니다. 내년에는 큰아이와 같은 학년 친구가 꼭 한 명만 왔으면 좋겠습니다.
요즈음 저는 이런 저런 고민들을 하고 있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려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고려하고 결정을 하자니 결론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기도를 해 보아도 마음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작은아이처럼 간단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하고, 자신이 아는 방법으로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면 일이 성사됩니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덜 성숙한지라 이런 단순함이 제게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들을 보고 행복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복잡한 현상과 생각들 속에서도 어떤 문제가 되었든지 간에 약속한 ‘낮 삼십분’을 지키면 됩니다. 설혹 오늘 당장 약속한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낮 삼십분’을 지킬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을 기억해 주는 친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남들이 듣고 키득키득 웃을만한 어설픈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이웃과 나눈 ‘낮 삼십분’을 성실히 지킬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봅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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