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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28 23:15
   
내 백성을 위로하라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92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589 [211]


내 백성을 위로하라


  ‘디아스포라’(diaspora)는 예루살렘 멸망이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스포라’는 씨앗이란 뜻이다. 즉 밭에 씨앗을 뿌린다는 의미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 사이에 흩뿌려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디아스포라 규모에 관한한 한민족은 강대국에 속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디아스포라는 중국인이며, 이어서 이스라엘, 이탈리아, 인도 사람들 순서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한인이 디아스포라로서 타 민족과 섞여 살아간다. 2013년도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700만 명을 갓 넘어섰다.


 
  세계 곳곳에 사는 해외 동포들은 자신을 ‘한(韓)인’, ‘조선(朝鮮)족’, ‘고려(高麗)인’, ‘조선사람’, ‘카레이스키’ 등으로 제 각각 다르게 부르며 살아왔다. 이렇게 많은 해외 한인동포들의 존재를 보고 ‘민족공동체의 확장’이니, ‘글로벌 시대의 선구자’라는 식의 그럴 듯한 해석을 달기도 하였다.


  해외 동포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경제적 가난 때문에 시작되었다. 흰옷을 입은 백성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 북간도를 비롯해 러시아 연해주, 하와이와 멕시코 그리고 일본 강제징용 등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유랑민처럼 조국을 떠났다. 해방 이후에는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로 독일로, 농장 개척을 위해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 중동의 노동자로, 풍요의 신대륙을 꿈꾸며 미국과 캐나다,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어느 새 해외 동포의 가계는 짧게는 2세대 길게는 4, 5세대에 이른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와 모국은 해외동포들의 존재에 대해 무심해왔다. 소극성을 넘어 부정적인 교민정책을 펴왔던 근본적인 이유는 외국국적을 지닌 동포에 대해 사실상 다른 민족으로 간주한다는 그간의 정책과 맞물려 있다. 해외동포들은 해방 이전에는 나라 없는 서러움으로, 분단 이후에는 남북 대결 정책으로 갈등을 겪어 왔다. 그럼에도 해외 동포들은 자기 민족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본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남달리 진지하였다.


 
  단적으로 재일본 동포들이 그렇다. 해방 당시 일본에 살던 동포는 200만 명이었다. 이 중 140만 명은 귀국할 수 있었으나, 60만 명은 영구히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 당국의 집요한 제도와 인습적 차별, 예를 들어 지문날인, 일본이름 쓰기, 귀화 등을 강요받았다. 동포 사이에도 ‘재일 한국인’과 ‘재일 조선인’ 즉, 민단과 총련으로 철저히 양분되어 서로 등을 돌린 채 살아왔다. 사실 3‧8선은 한인 디아스포라가 사는 모든 곳에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재일 조선학교는 재일본 동포들이 사회적 소외와 분단의 긴장을 겪으면서도 우리말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 유일한 보루였다. ‘조선학교’가 굳이 ‘조선’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까닭은 남북 분단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나라의 이름이 조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단 이후 남과 북, 일본 어느 국적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레 조선적(朝鮮籍)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내에서 조선학교는 조선적, 한국국적, 일본국적을 가진 재일 동포들이 함께 하는 국제학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적이 아닌 민족이 입학자격이 된다. 비록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정식학교로 인정하지 않아 한 때 540여 개에 달했던 조선학교는 학생 수의 감소와 재정난으로 겨우 80여개만 남아있다.


  최근 일제강점기와 재일본 동포의 역사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지난 주 오바마 미 대통령은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여, 원자탄 투하 71년 만에 ‘원폭사몰자위령비’ 앞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수십만 명의 일본인과 함께 “수천 명의 한국인” 그리고 수십 명의 미국인을 언급하면서 희생자를 추모하였다. 그는 같은 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 위령비는 그냥 지나쳐서 짙은 아쉬움과 원망을 남겼다.


  물론 지난 71년 동안 피폭자로서 비극을 대물림해온 제 나라 백성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한 한국정부를 생각하다면 그리 분노할 일은 못된다. 일제강점기는 71년 전에 막을 내렸지만, 1945년 8월 6일 그 때부터 히로시마 한인 피폭자들은 몸과 마음을 핵 후유증에 강점당하며 살아왔다. 세대를 이어가며 핵 볼모가 되었다. 19대 국회가 마지막 회의에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킨 일은 만시지탄이긴 하나 겨우 해묵은 실마리를 풀기 시작한 셈이다.


  온 세상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디아스포라는 제 나라 정부의 어깨에 기대고, 가슴에 안겨 살기를 원한다. 거리를 활주하는 한국 자동차를 보면서, 한류 가수와 드라마의 열기가 뜨거울수록 가장 큰 자부심으로 느끼던 그들이었다. 한인디아스포라는 여전히 우리 동포요, 자매와 형제이다. 민족 공감의 시선에서 비켜나는 사건이 일어날수록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는 음성이 더 귀에 쟁쟁하게 울린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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