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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22 22:22
   
멘붕과 힐링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56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556 [186]


멘붕과 힐링


  강남역 10번 출구 부근에서 일어난 화장실 살인사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생활현장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충격적 사건이었다. 웬만한 살해 방식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크게 놀라 안절부절한다. 살인의 배경이 단지 여성혐오라고 말하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 단순하고 가벼워 누구도 인과관계를 쉬이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만큼 생각을 초월한 범죄들이 우리의 감정의 파고를 길들이고 있다. 두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방어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와 취약한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급격히 늘고 있다. 소소하게 치부한 일상적 폭력이 극단화하고, 새털처럼 가볍게 여겨온 인명경시 풍조가 사회적 살해로 까지 수위를 높였다. 이젠 십 수 년 동안 사실상 중단된 사형집행을 다시 현실화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보복폭력으로서 신체적 형벌에 대해 공분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보통치 여성들이 참여하는 추모의 촛불행렬과 항변의 필리버스터가 거리에서, SNS를 통해, 끝없이 계속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물론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를 개인의 분노나 원한 혹은 혐오감정에만 책임을 묻는다면 온갖 예방책은 무력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치안소홀이나, 학교교육의 문제, 땅에 밟힌 도덕의식에 탓을 돌린다면, 면피용 뭇매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온전한 대응은 요원하기만 하다. 어쨌든 임기응변이 아니라 한국이란 공동체 전체가 당사자가 되어 안전한 사회를 만들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


  
  도시의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은 그야말로 우리 사회를 ‘멘붕’ 상태로 몰아갔다. 딸이든, 딸 가진 부모든, 사회적 안전망을 잃고 나니 심리적 안심방어선이 크게 흔들렸다. 이젠 신조어라고 말하기에는 낡아 버렸지만 ‘멘붕’이란 단어조차 ‘멘탈 붕괴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 되어 버렸다. 멘붕이란 사회적 공감어 마저 외부에서 온 심리적, 물리적 충격 때문에 스스로 지탱할 능력을 잃고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동안 멘붕 상태에 대한 대응어로 ‘힐링’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멘붕의 다양한 현상에 대해 어떤 경우에든 힐링이란 처방을 가져다 붙이면 적절한 감정조절기능을 하였다. 물론 힐링은 신조어가 아니라,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치유라는 말이다. 심리 치료, 내면 치료는 물론 영혼 치료라는 영적 의미로도 힐링은 쓰여 왔다. 멘붕이든 힐링이든 이렇게 유용한 단어들조차 이젠 개그 수준 이하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이 지극히 상징적이다.


  ‘멘붕과 힐링’, 창과 방패 같은 이 두 가지 단어는 최근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문제는 멘붕이든 힐링이든 그것을 겪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못해 왔다는 점이다. 너무 쉽게 웃음소재가 된 까닭이다. 


  멘탈이든, 힐링이든 사실 ‘샬롬’의 다른 말이다. 그리 쉽게 떠들 수 없을 만큼 삶의 무게감이 넘쳐나는 언어인 셈이다. 정녕 남의 아픔과 개인적인 상처에 대해 쉽게 말하는 일은 위험하다. 제 공감의 능력이 그만큼 나아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옳다. 사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다. 만약 사람의 아픔과 문제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인격은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특히 언론이나 전문가연 하는 이들은 너무 쉽고 너무 가볍게 멘붕과 힐링을 떠들어선 안 된다. 이젠 나남 없이 두고두고 문제를 부둥켜안고, 상처를 싸매며, 공통의 분노와 연민어린 공감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가 남의 아픔과 상처에 참여하려는 마음을 가지려고 할 때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역할이 가능하다. 이렇듯 치료 과정에 부분적으로나마 결합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치유의 능력을 조금씩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깊은 유대감 속에 모두가 안심하고 살 길이 비로소 열릴 것이다.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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