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과 속이 다른 신앙인, 어찌할까
‘겉볼안’이란 말이 있다. 겉모습을 보면 그 인간됨까지 얼핏 알아볼 수 있다는 뜻에서 쓰인다. 하지만 이 말이 다 맞지는 않는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내가 고등학생 때 신앙생활 하던 교회에 새롭게 담임목사님께서 부임하셨다. 그런데 그 겉모습이 영 아니었다. 그래도 ‘목사님’ 하면 뭔가 풍기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 아니다 싶은 생각이 꽤 오래갔다.
하지만 문제투성이이던 교회를 하나하나 다잡아 가시며 목회하시는데 이전의 어떤 목사님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가뿐히 해내셨다. 나름 생각이긴 하지만, 그 인상파 겉모습이 한몫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가끔 위트로 자신의 겉모습이 목사가 되어 그래도 멋있게 바뀐 거라며, 예전엔 참 볼품없었다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난다.
난 ‘겉볼안’이란 단어, 그때부터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적어도 ‘겉볼안’과 ‘빛 좋은 개살구’를 동시에 생각하는 안목을 구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보고 당하는 경우가 내 인생에 구름더미를 몰아다 줄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요즘 인면수심의 신앙인들 이야기가 지상을 달군다. 보다 신앙적인 발언을 잘하는 측이 비신앙적 작태를 보일 때가 많기도 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유학파 목사의 중학생 딸 구타 실인은 모두를 경악케 했다. 그가 20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보도를 접한다.
에릭 프롬은 “왜 이유 없이 인간은 같은 인간을 살상하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는가?”라고 자문하고, “성공하지 못한 돌출 인간들의 돌출 욕구의 변칙적 발산이다”라고 정의했다.
사회학자들은 어느 집단이건 90%의 인간은 평균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나머지 5%의 사람은 남다른 돌출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한다고 말한다. 돌출 인간 중에는 선도양(先導羊)도 있고 낙오양(落伍羊)도 있다. 전자는 지도자나 천재가 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돌출지향 인간은 희대의 악한이나 살인범으로 타락하고 만다.
예수님 때도 양의 탈을 쓴 종교인들이 있었다. 늘 예수님께서 그들과 갈등을 빚었다.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이 제일 양심적이고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하셨다. 우리 곁에는 ‘종교의 탈을 쓴 악한’이 많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사람도 많다. ‘00대표’ ‘00회장’ ‘00이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종교를 교묘히 이용한다.
물론 그런 자들은 100이면 100 모두 충성스런 종교인으로 변장하고 있다. 명함에 쓸 공간이 없을 정도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쓰임 받는다는 기록이 즐비하다. ‘겉볼안’이란 말, 사회에서도 그리 믿어지지 않는 말이 되었지만, 더욱이 교회에서는 이젠 이 말을 쓰레기통에나 넣어야 할 때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겉치레가 아니라 ‘거듭남, 영생, 천국, 구원, 성령...’ 이런 근원적이며 내재적인 단어들과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
김학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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