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지난 해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장로님께서 1층 사택과 2층 교회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십년도 넘게 사용하지 않은 건물을 구입해 교회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부엌의 씽크대는 쓸만하여 그대로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사용해보니 씽크대는 괜찮았지만 가스렌지 환풍기가 오래되어 잘 작동하지 않아 새로운 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남편이 직접 설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외벽에 노출된 바람이 나가는 통로에 새들이 집을 짓고 알을 낳습니다. 타닥타닥 소리가 나기도 하고 짹짹 새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도무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몰라 건물 밖에서 몰래 숨어 지켜보면서 알아낸 사실이었습니다. 어린시절 친정집 처마 끝에 제비가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작은 새가 연신 드나들며 먹이를 물어다 날랐습니다. 그렇게 지난 해 새들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습니다.
올해도 가스렌지 환풍구에서는 타닥타닥 소리가 났습니다. 또 새가 집을 지었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음식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가스렌지 환풍기를 틀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들어와서 “여보 음식하다가 더워도 렌지후드는 틀지 맙시다. 거의 다 부화한 알 두 개가 떨어져서 깨졌어.” 하고 말했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어미 새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저는 알았다고 말하고 가스렌지 후드의 코드를 뽑았습니다. 혹시라도 또 음식을 하다가 무심결에 켜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잠깐이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저희 가정의 이웃에게 너무 무심했나 싶었습니다. 이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웁니다.
18년 전의 저희 교회 주보를 보았습니다. 흘리 마을 믿음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여름동안 큰나무 아래 세 식구가 비바람을 피해 오들오들 떨며 이슬비를 맞는다. 쉰벰골로 들어가며 오른쪽 밭 언덕 위가 이들의 보금자리다. 그 여인은 어려서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애기 어미가 되며 해방되어 인공치하 초기에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잠깐의 교회 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를 성령은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6.25때 공산당을 피해 쉰벰골에 정착했다.
당시의 밥그릇은 모두 컸다. 배고픈 딸들이 밥을 많이 달라고 졸라대면 나무를 주워다 불을 지피고 감자밥을 해서 밥그릇 아래 행주를 깔고 그 위에 감자밥을 담았다. 많이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밥을 많이 준다고 좋아서 깡충깡충 뛰던 아이들은 몇 숟가락을 떠먹으면 이내 행주를 발견하고는 밥이 적다고 울었다. 여인은 아들을 국군에 입대시키고 딸들만 데리고 살면서 “말 마라요. 고생한 것 그 고생한 것”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날마다 품을 팔며 살았지만 입으로 찬송하고 날마다 기도했다. 예배를 인도할 사람도 없고 달력도 없어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살던 세 식구에게 어느 날 주둔군 군종이 예배인도를 해 주었다. 여인은 예배를 인도하는 군종이 너무 고마워 옥수수나 찐 감자로 대접했다고 한다. 그 군종의 이름을 아시느냐 물었더니 키 크고 잘 생긴 청년이라는 말 밖에 못하였다. 이 여인은 권사 직분을 받았고 이름은 ***이시다.」
오래된 주보를 꺼내들고 매 주 교회공동체가 세워져 나간 이야기를 기록해 둔 것을 읽어보니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마도 마을과 교회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2대 담임목사님이 주보에 기록하기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처음 흘리마을에 기독 개척단 운동을 시작한 목사와 장로를 맞아들이고 뒷바라지 하신 믿음의 여인이십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 여인이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손수 흙으로 방 하나 부엌 한 칸인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집은 방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반듯이 누워서 잘 수도 없었지만 기도와 찬송이 있는 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4월의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가고 싶어도 교회가 없어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듯 하늘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천국에 계십니다. 군종이셨던 그 키 크고 잘 생긴 청년은 어디서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 믿음의 역사가 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과 삶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 한 여인의 생생한 이야기는 주보 속 글에도 있지만,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도 살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이야기 하실 때면 장로님이 항상 이 분을 이야기 하십니다.
지나고 나면 삶이 이야기가 됩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도,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도, 스스로 부끄럽고 작아지는 일들도, 인생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된 사건도, 모두 지나간 이야기가 되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전승되고 전승될 때 그 안에 믿음의 이야기가 풍부하다면 그만한 유산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나보다 못난 사람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초라한 순간에도 우리는 믿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으로 떳떳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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