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육을 생각하며
맘에 안 드는 며느리를 보고 시어머니가 한 마디 한다.
“넌 친정에서 도대체 무얼 배웠니?” 또는 “네 친정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던?”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건 가정교육이란 본디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 받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이다. ‘시집오기 전’이란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를 말한다. 학교교육의 현장에서는 스승은 없고 지식 전달자만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런 때일수록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더욱 신경 쓸 때다.
바빠 일에 얽매인 아버지, 성적표에만 관심이 있는 어머니, 방황의 골을 메우려고 허튼짓을 서슴지 않는 자녀. 이들이 이루는 가정은 좋은 가정교육의 현장이 되긴 힘들다. 가정교육은 사랑과 채찍이 동시에 필요하다. 당근과 채찍의 유무상통이 좋은 인격을 만들 수 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선 인생이 성공하듯.
우리는 ‘사랑의 회초리’를 이야기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를 한다고 한소리 듣는 세상에 산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다르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3:24) 이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폭력을 당연시하는 말이 아니다. 사랑의 아픔을 경험하게 함으로 바른 삶으로 이끌 수 있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황희 정승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평소 아랫사람들에게는 자상하고 너그러운 그였지만, 자녀들에게는 엄격했다. 한 아들이 골칫거리였는데, 방탕한 짓을 좋아해 외출만 하면 고주망태가 되어 늦은 시간에 돌아오곤 했다.
아들의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은 황희 정승이 하루는 관복을 차려입고 대문까지 나와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낯선 행동을 본 아들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아니라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은 예의인즉, 지금 저는 손님을 맞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여기 황희의 ‘따끔한 징계’가 있다. ‘사랑의 매’란 꼭 매를 때려야 하는 게 아니다. 필요할 때는 바로 이런 ‘따끔함’을 자녀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돈 버는 기술로 아버지를 평가하고, 재산 불리는 능력, 좋은 학원 찾아내는 능력으로 어머니를 평가하며, 성적순으로 자녀의 등급을 먹이는 시대에 산다.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다. ‘사람 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사랑의 회초리’가 사라진 학교교육에서 이걸 기대하기 힘들다면 가정에서 해야 한다. 부모는 고난과 징계가 자녀의 여문 삶을 기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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