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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19]
 
 
 
     
 
 
 
작성일 : 16-03-31 00:04
   
‘동주’
 글쓴이 : dangdang
조회 : 253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292 [178]


‘동주’


     가끔 잠자리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21년 전의 노트를 꺼내들 때가 있습니다. 지난밤이 그러했습니다. 노트에는 ‘송현여고 20247 홍지향’이라고 이름이 씌어져 있습니다. 꿈은 많지만 고단하기도 했던 18살에 저는 2학년 1반 47번이었습니다. 노트에는 학년, 학기가 바뀔 때마다 국어 책에 나왔던 시들이 적혀 있고 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될 만한 시의 주제와 은유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적혀 있습니다. 정리해 둔 목차를 보면 서정주의 시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윤동주, 김소월 순입니다.  1번 김종길의 ‘성탄제’를 시작으로 55번 백석의 ‘여승’으로 끝을 맺는 작은 노트는 21년째 저를 따라 이사를 다니며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나 빨리 흘러갔나 싶기도 하고, 그때 이걸 참 잘 정리해 두었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처음 중학생이 되었을 때 1학년 교과서에 나왔던 이형기의 ‘낙화’를 어렵게 암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키가 크고 잘 생긴 국어 선생님은 시는 꼭 암송해야 하는 것이라며 책에 나오는 모든 시를 암송시키셨습니다. 순서대로 일어나 시를 암송하던 올망졸망했던 여중생들이 떠오릅니다.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팔을 세게 꼬집히는 아픔이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 국어 선생님은 시와 소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셨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도 기억이 납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창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를 비를 바라보시면서 감상에 젖으신 선생님은 “얘들아, 너희들은 비가 오면 무슨 생각을 하니?”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처마 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빗물을 생각했습니다. 빗물에 흙이 얕게 패이면 빗물은 왕관 모양을 만들며 빠른 속도로 똑똑 떨어집니다. 마루에 누워 그 빗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잘 다듬어진 연주곡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빠지려고 할 때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던 제일 뒷자리에 앉은 운동부 학생이 “비가 오면 물이 튀고 더러워요”라고 대답했고 아이들은 모두 웃었습니다. 그 날 선생님은 진심으로 화를 내시고는 저희들에게 자율학습을 시키셨습니다.


   어제 영화 ‘동주’를 보고 왔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시인 윤동주, 어둠의 시대를 살다가 떠난 시를 사랑한 한 청년의 모습이 흑백영화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지는 동안 저녁식사를 건너뛴 저의 배고픔도 담담하게 사라졌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윤동주의 시구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서정주는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고 표현했고, 이형기는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라고 했으며, 윤동주 자신도 ‘시인은 슬픈 천명’이라고 했습니다. 한편의 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고뇌와 고통이 뒤따르는지를 보여주는 말들입니다. 그러니 ‘시가 쉽게 씌여진다’는 것은 그만큼 어둠이 짙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시인이 한 줄의 절제된 은유를 사용하기까지 얼마나 생의 에너를 응축시켜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시인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아픔을 살아주는 고마운 이들입니다.


    책장에 오랜 시간 먼지를 맞고 있던 연세대학교 12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윤동주 전집」을 꺼내 들었습니다. 책 속에는 윤동주가 남긴 詩가 원본대조로 실려 있고, 연보에는 간단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조부는 기독교 장로였고, 외삼촌 김약연은 명동학교를 세우고 많은 지사를 길러낸 선각자였으며 훗날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22세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당시 윤동주는 이화여전 구내의 협성교회에 다녔으며, 여름방학에는 고향인 용정의 북부감리교회 하계 아동성경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외사촌 송몽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하던 중 수감되고 옥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윤동주 사후 37년이 지나서야 京都 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이 입수되어 윤동주의 죄목이 「독립운동」임이 밝혀졌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운명 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윤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에 간 유족에게 전해준 말입니다.


   전쟁이란 극소수의 이익을 대변할 뿐입니다. 이기고 지고의 결과가 주는 의미보다는 전쟁 자체가 남기는 폐해가 훨씬 큽니다. 저도 비록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지만 전쟁의 그림자가 아직도 이 사회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날마다 목도합니다. 전쟁의 위협을 경제적,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동주’를 욕보이는 일입니다. 최근 ‘동주’와 함께 상영되고 있는 ‘귀향’이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3.1절을 맞아 관람하며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자유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에 좋은 영화들입니다.


   끝까지 미워하고, 지독하게 응징하며,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오직 개개인의 내적인 변화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요지의 영화 대사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누군가 미워져도 끝까지 미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도 너무 지독하게 마음먹고 응징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제 기준에 맞추어 정확하고 철저하게 통제하려고 하지도 말고, 그런 취지의 법에는 동의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고통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괴롭지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더 큰 문제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자 한 윤동주의 희망과 순수가 저 자신에게도 못내 그립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2:4)


   화해하고 용서하는 길, 지독하게 자기 자신과 타인을 아프게 하지 않는 길, 삶 속에서  전쟁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길, 자신의 광기를 알고 선하게 다스리는 길,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그 길을 오늘 저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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