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본질
한 불자와 지혜로운 스님 간의 질의응답을 들은 적이 있다. 불자는 물었다. “스님,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고 곤란한데 새벽예불을 꼭 드려야 하나요? 부처님은 어디나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스님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부처님은 어디나 계시니 일하다가도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아무 때나 기도를 드려도 됩니다.” 질문을 한 불자는 이 대답에 매우 만족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스님은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꼭 새벽예불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에 거리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지혜로운 스님의 지혜로운 대답에 나는 그만 신선한 충격을 받았더랬다.
새벽기도, 주일성수, 십일조. 하나님은 어느 때나 계시니 꼭 새벽에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매순간 하나님을 생각하고 드리는 기도야말로 참 기도가 아닌가? 하나님은 또한 교회라는 장소에만 매여 계신 분이 아니니 주일에 무조건 교회를 나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다른 곳에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예배가 아닌가? 십의 십이 다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이 무슨 거지도 아니고 십의 일을 구걸하는 분이 아니지 않느냐, 오히려 모든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경영하도록 애쓰는 것이 참된 십일조가 아닌가? 모든 것이 다 형식일 뿐이고 형식보다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하곤 한다. 사실 위의 주장은 모두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만약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저 스님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꼭 이것들을 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당신의 마음에 거리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표현이 뭐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 중요해 본질이 중요하지.” 그러나 표현 없는 마음이 어떻게 상대방에게 전해지며, 형식 없는 본질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을까? 형식과 본질에 관하여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레 미제라블>의 저자인 빅토르 위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형식은 표면에 나타난 본질이다.”
이번 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재의 수요일에 목사와 사제들은 신도들의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성수를 갠 재로 이마에 십자를 그어준다. 이 재는 지난해 종려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 잎을 태워 만든 것이다. 목사와 사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예식을 행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 3:19) 통회와 참회를 위한 시작은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 나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금식을 하기도 하고, 절제를 하기도 하며, 금욕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왜 이때만이냐, 일 년 365일이 다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냐,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형식 아닌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시 이것이다. 맞다. 이 모든 것은 다 형식이다. 그리고 형식은, 표면에 나타난 본질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행동이 있소. 나는 내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당신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오.’ 당신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약 2:18-19)
이진경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