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일용할 양식’부터 거대 담론인 ‘하나님 나라’까지 모두 일곱 가지 간구가 담겨있다.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을 반복하지만, 일용할 양식과 하나님 나라는 끝없이 위협을 받고 있다. 여전히 하루 세끼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고, 이 땅에서 하늘의 평화는 너무 요원하기만 하다.
주님의 기도 가운데 ‘일용할 양식’은 모든 간구 중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다. 가난한 자의 음식인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청은 보편복지보다 더욱 보편적인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의 내용이다. 로마이어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주기도문의 네 번째 청원은 주기도문의 중심이고 핵심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초대교회부터 일용할 양식은 그 해석에 따라 성격이 분분하다. ‘일용할’로 번역된 ‘에피우시오스’는 전치사 ‘에피’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다고 한다. ‘살아가는데 필요한’(necessary), ‘오늘의, 이 날을 위한’(for today), ‘다음날, 내일을 위한’(for tomorrow) 또는 ‘장차, 미래를 위한’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번역한 제롬은 ‘위, 너머, 초월의’란 뜻으로 풀어 초월적인 빵으로 번역하였다. 세속적인 의미를 피하고 천상의 양식,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이해한 것이다.
마틴 루터는 ‘소교리문답집’에서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의 내용에 대해 일일이 대답을 주고 있다. “일용할 양식은 먹을 것, 마실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돈, 재산,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신뢰할만한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명예, 좋은 친구들, 의리 있는 이웃과 같은 우리의 몸에 양분을 주는 것,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일용할 양식이 참 구체적이고, 포괄적이어서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성경은 ‘빵’을 물질적 측면과 함께 영적, 사회적 의미로 두루 설명하고 있다. 누구보다 유대인들은 먹는 것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다. 신명기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묻고 나서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신 8:3)라고 대답한다. 히브리 노예들의 출애굽 정신은 궁극적으로 빵의 노예를 거부한 것이다. 그들은 유월절 밤에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먹으면서, 무교절 칠일 동안 애굽 종살이 시절의 고난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
독일교회 성찬식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당신은 우리 안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십니다”(Den Hunger und den Durst in uns, Kannst du. o Gott). 풍요로운 복지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빵만이 아니다. 만약 내 힘으로 배불리 먹고 마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찬식의 한 조각 빵과 한 모금의 포도주에서 영혼의 허기와 인간의 존엄성의 갈증을 해갈시킬 해방감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주체는 바로 ‘우리’이며,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더불어 나누어야할 빵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의 기도자는 ‘우리 아버지’(Vater Unser)의 자녀요, 아버지의 한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 역시 끝없이 위협을 받고 있다. 어느 경제학자가 예언한 것처럼 ‘88만원 세대’가 점점 현실화하고 있고, 세밑부터 우리 사회는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싸고 치킨 게임 벌이듯 정부와 지방자치체 사이에 책임 공방을 다투고 있다.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는 번번이 정책적 대안 찾기보다 이념전쟁 치루 듯 한다. 마틴 루터의 ‘일용할 양식’ 해석처럼 “우리에게 선한 정부와 신뢰할만한 통치자를 주옵소서”란 기도는 한낱 미몽일까?
송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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