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마당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를 모신 묘지가 있는 지역을 시에서 개발한다고 해 며칠 전 개장과 화장 절차를 밟아 그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러던 중 문득 독일에서 보았던 공동묘지가 생각났다. 가능하면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공동묘지를 두는 우리네와는 달리 독일의 공동묘지는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매우 가까이, 심지어는 거주지 한복판에 위치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의례히 공동묘지 주변을 거닐게 되기도 하고, 잘 조경해놓은 공동묘지 안으로 산책을 이어가기도 했다. 또한 중세 매장문화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까닭에 옛 교회들에는 늘 한 귀퉁이 땅에 신자들의 묘지가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영국교회로부터 배척당해 교회 안에서의 설교를 거절당하자 교회 밖에 청중들을 모으고 아버지의 무덤 위에 올라가 설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다 이런 배경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디 그뿐인가, 중요한 인물들은 심지어 교회 내부에 매장되기도 했다.
공동묘지가 가까이 있으면 기운이 좋지 않다든가, 귀신들이 넘친다든가, 흉측하다든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가급적 떨어져 살려는 우리와는 달리 이처럼 유럽인들은 늘 묘지를 교회의 품 안에, 삶의 품 안에 두고 살았다. 그들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음을 매일의 일상 속에서 담담하게 체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공동묘지를 독일인들은 ‘프리트호프’(Friedhof)라고 부른다. 평화를 뜻하는 ‘프리덴’(Frieden)과 마당을 뜻하는 ‘호프’(Hof)를 결합하여 만든 말이다. 그러니 우리말로 하자면 ‘평화마당’쯤 되겠다. 우리말 공동묘지가 너무나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설명임에 비해 평화마당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은유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다가온다.
교회의 뜰을 평화마당으로 만들어 죽은 신자들의 안식처를 마련한 것은 사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대림절과도 관계가 있다. 대림절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신 그리스도만을 위한 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림절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을 재현함과 동시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이천 년 전 역사 속에 오셨던 것처럼, 메시아는 이 역사의 마지막 날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절기. 그러기에 교회는 이 대림절을 교회력의 시작으로 삼았다.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그리스도’를 그 이름에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실상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역사의 끝,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죽은 자들은 부활할 것이고, 마침내 악인은 영벌로 의인은 영생으로 들어가게 될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남겨진 죽은 자들을 위한 소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교회의 뜰에 묻혀 안식을 누리며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신앙의 증언일까.
납골당이 대중화된 요즘 그렇게 넓은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니 교회의 뜰에 이 평화마당을 갖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산 자들이 평화마당을 바라보며 죽은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는 것은 얼마나 은혜로울까? 그렇게 다시 오실 마라나타 주님의 신앙이 교회 안에 불타오르면 얼마나 근사할까? 싱거울지도 모를 생각이 그렇게 찬바람에 스쳐갔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살전 4:16-17)
이진경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