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만큼
폴란드 출신의 사회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뉴기니 지역 현지 조사를 맡게 되어 트로브리앤드 군도 원주민들과 생활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회오리 가운데 있었고, 우연히 식인종 부족의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말리노프스키는 자연스럽게 노인과의 대화에 이 세계대전을 소재로 올렸다. 마침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 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식인종 노인은 인류학자에게 이렇게 물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고기를 어떻게 다 먹을 수 있습니까?” 말리노프스키는 노인의 질문에 기가 막혔을 터였다. 그는 이 야만적인 부족의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유럽에서는 같은 인간끼리 서로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자 식인종 노인은 공포에 질려 놀라며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그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야만적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늑대와 춤을>이라는 옛 영화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구도로 인디언을 바라보았던 던바 중위는 인디언들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그들에 대한 생각을 고쳐나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인디언들과 버펄로 사냥을 가나던 길에 거대한 무리의 버펄로 시체 떼를 발견한다. 그것은 백인들이 사냥해 가죽만을 벗기고 버려둬 썩어가고 있었던 버펄로의 시체 떼였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고기만큼만 버펄로를 사냥해서 돌아온 인디언들은 축제를 열고, 주인공은 한없는 부끄러움 속에 침울해한다. 시체 떼를 발견한 장면에서 주인공은 백인 사냥꾼들의 탐욕에 치를 떨며 이렇게 독백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영혼이 없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두 이야기는 서로 닮았다. 이것은 인간을 잡아먹는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원주민에게서 정작 문명인이라 자부하던 자신이 속한 세상이야말로 야만의 세상임을 깨닫게 된 아이러니 이야기 또는 야만의 이야기이며, 인디언 부족을 미개인으로 치부하던 자신의 인종이야말로 돈에 눈이 먼 영혼 없는 미개인임을 깨닫게 된 아이러니 이야기 또는 야만의 이야기이다. 전투에서 적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 식인종들은 그들의 의식(儀式)을 따라 그렇게 한다. 버펄로를 사냥해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는 인디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한다. 그러나 권력과 돈을 탐하는 문명인들은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살해하고 죽인다. 탐욕은 한계를 모르기에 ‘필요한 만큼’이란 말 또한 모른다.
지금은 과연 야만의 시대다. 일견 지성과 문명이, 영성과 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람들은 이미 ‘필요한 만큼’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목적과 수단은 뒤바뀌고 권력과 돈을 위한 욕망이 모든 곳을, 심지어는 가장 그래서는 안 되는 곳마저 지배하고 말았다. 교회와 성직이 사고 팔리며, 거룩한 자리는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욕망에 따라 분배된다. 이런 야만의 시대에서는 평범함마저 경이롭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안과 밖의 야만을 막을 방법은,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찾을 길은 없는 것일까? 버펄로 사냥 축제에서 인디언은 이렇게 말한다. “기적 같은 나날이다. 다만 신에게 감사할 뿐이다. 사냥은 그만하면 됐다. 필요한 만큼 고기를 얻었다.” 진정한 기적을 체험하고 참 감사를 신께 드리는 비결, 그것은 어쩌면 저 ‘필요한 만큼’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빌 4:11)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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