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어느 한 극단으로 쏠림으로써가 아니라 두 극단에 동시에 닿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세상을 살다 보면 모두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정치든, 인맥이든, 심지어 신앙이든, 사람들은 늘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렇게 나와 너를 가르고, 그렇게 너는 나의 적이 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극단에 갈라서서 서로의 저쪽 끝을 증오한다.
요한의 묵시 속에서 예수는 한 교회를 질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계 3:15-16) 이것 또한 극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얼음과 불의 이야기.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은 어느 쪽이 옳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두 극단 모두를 인정하시고, 두 극단 모두를 기대하신다.
몇몇 장면만 파편처럼 남은 한 옛 미국영화에서 엄격한 장로교 목사의 아들은 자유분방한 감리교인 여인과 사랑에 빠져 여인의 식구들은 집으로 초대했다. 한 집에 모여든 너무나도 다른 미국의 두 신앙 전통은 놀랍게도 아름다웠다. 장로교적 경건과 감리교적 자유, 영화를 보면서 신앙 전통의 차이란 무엇이 더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문제는 늘 미지근함이다. 둘 중 그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으면서 자신은 중용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은 얼마나 흔한가? 결국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양쪽을 다 비아냥거리며 우쭐대는 위선은 또 얼마나 얄팍한가?
예수님은 언제나 극단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극단이라는 것이 한 쪽만의 극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혁명가들에게는 극단적인 보수 온건파였던 반면,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극단적인 진보 강경파였다. 모든 쪽으로부터 욕을 먹으셨던 주님은 차기도 하고 뜨겁기도 했다. 미지근했더라면 보존했을 목숨이 무사했을 리가 없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저 철학자의 말처럼 사람은 어느 한 극단으로 쏠림으로써가 아니라 두 극단에 동시에 닿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증오와 혐오로 충만한 이 세상에 당장 필요한 것은 다른 극단에 대한 인정과 존경, 그리고 다른 극단에 닿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사족이긴 하나 파스칼은 정치적 목적이나 명예를 위해 살인까지도 용납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도 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데도 명예나 재산의 상실을 두려워하여 살인을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법률은 결코 없습니다. 신부님,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을 조금 바꾸어 읽어 보았다. “목사님,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 잠시 먹먹해졌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구나.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계 3:15)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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