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치에게서 배운다.
살아있는 갈치를 보기는 힘들다. 이유인즉 갈치는 성질이 급해서 물에서 건지면 바로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질이 급해서’라는 말이 보여주듯 사람들은 이런 갈치의 사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른 환경에는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것만 완고하게 고집하는 극단적인 성격으로, 그래서 이 성격을 갈치의 치명적 약점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태가 그러하듯 이런 갈치의 성격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물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갈치는 자신에게 생명과 삶을 제공하는 물을 잠시라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갈치는 그것을 잠시라도 떠난다면 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갈치라는 생물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충실하고 얼마나 결연한가.
스스로를 신앙인이라 여기는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이해한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영을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갈치와 달리 이 물을 떠나도 쉬이 죽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죽기는커녕 너무도 다른 세속의 환경에, 낯선 환경에 매우 잘 적응하고 만다. 영혼의 생명이 유지되는 곳을 떠나버렸는데도 우리는 너무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는 곳을 떠나면 곧바로 죽어버리고 마는 갈치는 이 대목에서 몹시도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나라가 망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땅을 떠나 포로로 잡혀간 낯선 땅에서 자신들의 심정을 노래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시 137:1-6) 그들은 결코 적응하지 못했다. 언제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여겼고, 긴 세월 시온으로 돌아갈 날만을 애타게 고대했다. 이 마음, 다름 아닌 물을 떠난 갈치의 심정이 아닌가.
우리는 갈치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갈치가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죽어버리 듯, 우리의 영적 생명도 믿음 안에서만, 말씀 안에서만, 기도 안에서만, 찬양 안에서만 유지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는 물 밖으로 나와도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물을 떠난 순간 우리의 생명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물 밖에 나와 버렸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마도 타인과 자신을 향한 나의 말이, 나의 마음이 그것을 보여 줄 것이다. 공허한 말과 상처의 말이 나로부터 나고, 조급한 마음과 답답한 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 이미 물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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