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패전처리
46억년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볼 때 인간이 등장하는 시간은 오후 11시 59분 55초라고 한다. 나아가 현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하루가 끝나기 고작 3초전에 등장했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은 문학가답게 지구와 인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만일 에펠탑의 높이가 지구 생성 이후의 시간 길이를 가리킨다면 인간 출현의 역사는 에펠탑 꼭대기에 칠한 페인트 두께에 불과하다.” 46억년의 시간을 진정으로 느끼고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 스스로의 존재를 뛰어 넘어 상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고작 100년도 못 미치는 생의 시간을 소유한 인간에게는 시간과 역사의 유구함을 그저 이렇게 비유적으로나마 상상해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만을 놓고 보더라도 역사의 굴곡은 대개가 인간의 수명보다 긴 흐름을 탄다. 역사의 단위는 수십 년, 수백 년을 넘어 수천 년에까지 이르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승리의 시대를 살고 싶어 하지만 모두가 승리의 시대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중하게 굴곡을 따라 흐르는 역사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찰나의 시간이 구시대의 흑암과 쇠망의 역사에 놓이지 않았다면 다행인 것이고, 나아가 우연히도 빛으로 가득 찬 새 시대에 놓여 있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도도한 역사는 개인의 소망과 의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찍이 노자는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그저 제사에 쓰였다가 무심히 버려질 추구(芻狗=지푸라기 개)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為芻狗)
사정이 이럴진대 역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감각이다. 지금 나는 어느 시대에 속해 있는가에 대한 감각, 이 감각은 역사의 발전을 믿고 그 싸움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더욱 필요한 감각이다. 이 감각은 지금 내가 품고 있는 희망이 구시대에 대한 쓸데없는 희망인지 새 시대를 위한 의미 있는 희망인지를 가늠하게 해주고, 그 속에서 적절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야구의 예를 들어본다면 야구에서 중간계투로 나오는 투수는 둘 중 하나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경기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투수이거나, 이미 승산 없는 경기를 정리하기 위한 패전처리투수다. 그리고 패전처리투수라면 투수는 어설픈 희망 놀이에 휘둘리지 말고 다음 경기를 위해 지금의 경기를 성실하게 잘 져야 한다. 결국 애매한 상황 속에서 올바른 것을 선택하는 능력은 경기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감독의 감에 달려있다.
시대를 감지하는 눈 또한 이와 같다. 지금의 교회와 사회가 내뿜는 절망적인 신호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 것인가? 농후한 절망의 징조들 속에서 모두가 의례히 희망을 찾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은 희망을 품는 것 자체가 적절한 것인지부터 따져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희망을 말했을 때 홀로 절망과 패배를 예언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어쩌면 지금은 다음 경기를 위한 패전처리투수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마 16:2-3)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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